대만 혼여 #5 DAY 1_pm 03:17
타이베이 메인스테이션. 타이베이의 중심에 위치한 대중교통 허브. 메트로, 고속철도(THSR), 철도(TRA) 등 다양한 교통수단이 집결하는 곳이기 때문에 대만에서 가장 바쁜 역으로 꼽힌다. 드디어 이곳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 근처에 내(!) 호텔이 있다.
호텔을 예약할 때, 도무지 어디로 위치를 정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비행기티켓을 예약하고, 바로 호텔 예약 앱부터 들락거렸으니 알 턱이 있나. 급하게 타이베이 여행에 대해 서치 하기 시작했다. 블로그와 유튜브를 넘나들며 대만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의 조언과 경험담을 모조리 주워 담았다.
‘서울의 명동, 도쿄의 시부야로 비교되는 대표적인 타이베이의 번화가, 시먼딩’
‘가성비가 중요하면 꼭 시먼딩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첫 혼여라면 시먼딩이 안전하고, 어디로 가든 대체로 교통이 편리하다’
‘교외로 갈 거면 타이베이 메인 역과도 가까울 것’
‘1일 버스 투어를 할 예정이라면 그 집합지 근처에 숙소가 있는 게 좋다’
‘버스 투어 집합 장소는 보통 시먼 역과 타이베이 메인 역’
‘대만은 창문이 없는 호텔도 많은데 웬만하면 창문이 있는 게 덜 답답하다’ 등등.
마지막 여행으로부터도 7년 만의 여행. 있었던 ‘여행 감’마저도 다 사라졌을 시간. 호텔 선정에서 고려해야 하는 그 목록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며 다시금 ‘그동안 내가 참 편하게 여행을 다녔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껏 모든 여행은 혼자가 아니었다.
동행인들이 적당한 곳을 찾아서 제안을 해주면 내가 1/n의 몫으로 얼마를 지출하면 되는 건지, 룸 컨디션이 어느 정도인지만 판단하면 됐다. 나는 대체로 ‘다 좋아’라고 하는 편이었고, 토를 달지 않고 냉큼 경비를 부쳐주는 것이 그들의 노력에 보답하는 나의 노력이라고 믿었다. 다들 나보다 여행을 많이 다녔고, 무엇을 어떻게, 왜 그래야 하는지, 잘 알았다. 그래서 그들의 배려와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았지만 내가 아닌 그들이 그 역할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들과 나의 역할이 매번 그렇게 나눠진 것은 ‘각자 잘하는 것을 하면 된다’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으로 짐작한다. 대신 나는 ‘고맙다’라는 말과 ‘덕분에’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하지만 여행 준비라는 현실을 혼자 오롯이 감당해야 했던 부모님과의 첫 자유 여행에서 그들을 향한 내 고마움이 많이 부족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니, 고마움의 양이 부족했던 게 아니라 애초에 고마움의 방향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내게 그런 배려를 했던 건 ‘잘할 수 있어서’라는 잘난 마음이 아니라 ‘잘해주고 싶어서’라는 애정 어린 마음이라서 가능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부모님과의 여행 준비를 그렇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잘해 준 것에 대해 고마워할 게 아니라 잘해주고 싶은 마음에 고마워해야 했다.
시티즌 M 타이베이 노스게이트. 내가 예약한 호텔. 걸어서 시먼 역과도 타이베이 메인 역과도 8분 내외에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나름 다른 호텔에 비해 저렴했으며, 110V를 쓰는 대만에서 220V 사용이 가능하다는 점이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앞서 여러 글에서 밝혔듯이 호텔로 향하는 길에서도 나는 불길한 상상과 싸워야 했다.
‘근데 나 혹시 호텔 예약 안 된 거 아니야?’
심지어 그냥 예약만 한 게 아니라 호텔에 직접 예약 확인 메일까지 보내고 예약됐다는 답장까지 받았으면서도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거기다 야무지게 ‘Special Requests’까지 넣지 않았던가. 시티뷰에 고층을 달라고.
호텔은 셀프 체크인 시스템이었는데, 체크인을 도와주는 직원도 있기는 했다. 키오스크가 시키는 대로 혼자 체크인을 하려던 나에게 직원 중 한 명이 다가와 거들었다.
‘너 예약 번호가 뭐니?’
혼자 하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던 터라 영어 공격(!)이 들어올 것을 예상하지 못한 나는 3초간 무슨 말인가 생각하다가 겨우 대답했다.
‘아, 예약 번호? 잠깐만...’
핸드폰 캡처 화면을 보여주자, 그녀는 난색을 표한다.
‘이거 밖에 없니? 이건 예약 번호치고 너무 긴데?
이거 말고 다른 건 없어?’
당황한 나.
‘응... 나는 이거만 받았어’
‘그럼, 여권 줘 볼래?’
헉, 설마 진짜 나 예약 안 된 건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이미 방을 뺏긴 채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당연히 내 이름으로 예약된 방이 있었다. 하지만 ‘Special Requests’ 조건까지 넣었건만 내게 떨어진 방은 5층, 저층이었다. 소심하게 그녀에게 어필해 본다.
내가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다.
‘저기 있잖아.
나 시티뷰에 고층으로 달라고 했거든.
근데 지금 보니 내 방이 저층이네.
혹시 고층으로 안 될까?’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실제로 한 말은....
‘Why low floor?’
나의 어이없는 영어를 찰떡같이 알아들은 그녀는 지나치게 친절하게, 그리고 열심히 설명해 준다. 그녀의 영어는 나의 오른쪽 귀에 도착했다가 이내 반대편 귀를 향해 도망치듯 사라진다. 아마도 그녀는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너의 요구 사항을 우리가 들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 하지만 안 될 수도 있어. 거기다 오늘은 풀 부킹이거든. 방 배정은 랜덤 사항이라서 나도 어쩔 수 없어, 뭐 이런 말을.
내가 저 말을 다 알아들었냐고? 노노. 내가 정확하게 알아들은 영어 단어는 ‘booking’, ‘random’ 정도뿐이었다. 하하하. 하지만 나는 마치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는 듯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오케이, 땡큐’하고 순순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향했다.
혹시나 올 지도 모르는 이날을 위해 지난 몇 년간 영어 회화를 그렇게 공부했는데, 고작 이 실력이라고? 말도 안 돼...... 아닐 거야... 그렇지...?
‘땡’
엘리베이터가 정신 차리라고 종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