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혼여 #6 DAY 1_pm 03:28
실력이랄 것도 없지만 그래도 본래에는 나름의 희망이 제법 컸던 나의 영어 회화에 대한 충격까지 잔뜩 실린 캐리어를 끌고 빨간색 카펫을 입은 복도를 도망치듯 걸었다. 원래 바랐던 고층이 아닌 저층 방에 대한 기대감이 완전히 사그라들고, 실망을 준비한 엘리베이터. 5층까지 가는 그 시간이면 충분히 변신을 하고도 남았다. 6층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애써 실망을 누르려 입을 삐죽거린 채로 터벅터벅 방에 들어섰다.
이 호텔의 가장 큰 매력은 침대와 세트처럼 배치된 통창이 있다는 것. 침대와 창이 ‘ㄴ’ 자 형태로 한쪽 코너를 완전히 장악하도록 대부분의 방이 꾸며져 있다. 비록 열리지는 않는 관상용 창일 뿐이지만 화이트 톤의 방에서 이 창이 보여주는 존재감은 정말 대단하다. 독특한 배치가 불러들인 바깥 풍경은 마치 액자에 담겨 숙소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착각을 일으킨다. 보지도 않고 실망부터 한 나 자신을 부끄럽게 만드는 풍경. 편견과 착각은 사람을 이토록 어리석게 만든다.
‘와...!’
호텔이 10차선 교차로 한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시티뷰의 장점을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고층이라면 장난감처럼 보였을 바깥 풍경이 생기 넘치면서도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잘 정돈된 널찍한 도로 위를 달리는 노란색 시내버스. 도로 가장자리 맨 앞 지정된 정차 구역에 모여있는 아기자기한 오토바이 무리. 우리나라보다 다양한 색깔의 승용차들의 주행과 이 모든 것들을 싱그럽고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들어주는 다양한 종류의 푸르른 나무와 알록달록 꽃까지. 소리 없이 신호에 따라 차곡차곡 움직이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불과 몇 분 전 충격적인 나의 영어 회화가 어쩌면 저 도로 위 주인공들처럼 가지런했을지도 모른다는 환상마저 들게 했다.
물론 그럴 리 없다. ‘Why low floor?’라니...
전이라면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의미가 통하면 된 거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것이다. 그 생각이 바뀐 건 아니다. 솔직히 대부분 그렇게 넘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래도 10년 전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건 너무 실망스러웠다.
2017년 무렵 방송된 <나 혼자 산다> '얼장' 배우 이시언의 에피소드는 주민센터에서 영어강좌를 듣는 것이었다. 그 수업의 수강생은 3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으로 강의 주제는 ‘cuisine(요리법)’. 말이 강의지, 오히려 발표 수업에 가까웠다. 그중에서도 우리 엄마 아빠 뻘 되는 분들이 자신의 요리 레시피를 영어 '문장'으로 설명하는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나는 정규 교육으로 10년 이상 영어를 배웠는데도 문장으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완벽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해야 ‘How much is it?’ 같은 것뿐이었다. 그러니 누군가 ‘How are you?’라고 물어오면 실제 내 상황과는 대부분 상관없었던 ‘Fine thank you and you?’라고 대답하고 마는 사람 중 한 명도 나였다.
매번 여행을 가서 영어의 벽을 느끼고, ‘이제는 진짜 영어 공부해야지’ 다짐했다. 하지만 후회도, 실망도, 다짐도 그저 여행 루틴의 하나가 되어버린 지 오래. 노력 한번 제대로 한 적 없었다. 여러 차례 뜻을 품고도 끝내 실행에 옮기지 않은 한심한 나를 방어할 변명은 있었다.
어차피 시작해 봤자 ‘작심삼일’ 일 테니까.
결심의 유효기간은 얼마일까. ‘작심삼일’이라는 속담 탓인지 3일로 보는 게 공신력(!)이 가장 높은 통계인 것 같다. 우리들의 결심은 정말 3일을 넘기기 힘들어서 ‘작심삼일’이 된 걸까. 아니면 오랜 시간 그 말에 세뇌당해서 모두가 3일 정도만 노력하다 마는 것일까. 그렇다면 언제나 이것저것 시작은 하지만 끝까지 하지는 못하는 사람이 나을까. 끝까지 할 수 없다는 걸 알아서 시작도 안 하는 사람이 현명한 걸까.
적어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보다는 하고 나서 한 실망이 낫다. 실망은 아쉬움으로만 남지만 후회는 다르다. 가져보지 못한 미련 덩어리일 뿐인 후회는 마음을 접어야 하는 순간, 포기마저도 어렵게 하니까. 삶의 많은 순간, 나를 구차하게 만든 것은 ‘내가 왜 그랬을까’보다 ‘그때 내가 만약 그랬다면’이었다.
<나 혼자 산다> 시청 후 마음이 요동쳤다. 설령 삼일천하로 끝날지라도 영어 공부를 시작해 보기로 했다. 인강과 유튜브의 도움을 받아 혼자서 했다. 그날로부터 매년 했지만 매일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하다 말다를 반복한 실력은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느꼈다. 영작은 꿈도 못 꾸던 내가 어느 날부터는 문법이 틀리든 말든, 말이 되든 안 되든, 단어가 맞든 틀리든, 영작을 조금씩 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침대에 드러누워 하얀색 천장을 노트 삼아 아까 호텔 직원에게 하려던 말을 천천히 되살려 본다.
Actually,
I asked you that i would like my room
with nice city view and high floor.
But my room is low floor.
Could you change my room
to the other room?
이제 파파고 해석을 돌려본다. 과연 어느 정도 맞고, 어느 정도 틀렸는지. 그리고 의미는 통하는 문장인지.
“사실, 저는 당신에게 도시 전망이 좋고
층이 높은 방을 원한다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제 방은 아래층입니다.
제 방을 다른 방으로 바꿔 주실 수 있나요?”
‘오, 나름 선방’
내 생각대로 의미 전달은 되는 문장 같았다. ‘원한다고 물었다’ 부분을 ‘요청했다’로 수정하고 이번에는 다시 한글을 영어로 바꿔 달라고 했다.
Actually,
I asked you for a room
with a good city view and a high floor.
But my room is a low floor.
Can you change my room to another one?
정관사, 전치사 틀리는 것은 매번 하던 실수라서 전혀 대수롭지 않다. 그래도 틀린 것을 눈으로라도 새기고 또 새긴다. 이렇게 한 번씩, 두 번씩 더 보다 보면 습관처럼 제대로 잘 쓰게 될 날도 오... 오... 오겠지? 안 오면 또 어쩔 거야. 하하하.
양치를 하고 시내 구경을 나가려는데 세면대 배수구가 막혀서 물이 빠지지 않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호텔 직원과 대화할 절호의 기회이긴 한데, 다시 없어지는 자신감. 그러나 최선을 다해 문장을 준비시켜 본다. 제발, 이번에는 아까보다는 잘하고 싶다.
Excuse me,
my sink isn‘t working.
Do you help me that?
이번에는 과연 몇 개나 살고, 몇 개가 틀렸을까.
Excuse me,
my sink is broken.
Can you help me?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보다는 하고 나서 한 실망이 낫다. 그래서 내 영어는 여전히 많이 실망스럽다. 그래도 해 본다. 하고 또 하다 보면 주춤하지 않고 틀려도 막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방구석 영어 한계를 넘기 위해 문장을 채비시켜 엘리베이터에 같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