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혼여 #7 DAY 1_pm 04:38
여행 계획(!)은 구체적으로 짜지 않았다.
첫째 날 시먼딩 구경.
둘째 날 홍마오청 & 단수이.
셋째 날 중산 카페 골목 방문 & 카페에서 책 읽기.
넷째 날 공항 가기
인정한다. 누군가는 계획으로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한 줄 요약에 불과하다는 것을.
계획이 이렇게 단순해진 데에는 몇 가지 굳건한 사정과 지난 여행의 시행착오 때문이었다. 언제나 맨 선두에 서 있는 이유는 저질 체력. 저질 체력이라는 말도 과대 포장이다. 냉정하게 따지면 체력이 없다고 봐야 하는 수준에 가깝다. 그다음 이유는 내가 MBTI ‘P’ 형의 인간이기 때문에. 세 번째 이유는 날씨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어느 날부터 생긴 이유는 갑자기 마음이 바뀔 수도 있고, 한 번 간 곳을 또 가고 싶을 수도 있거나 반대로 갈 수 없는 사정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실제로 그런 일이 대만 여행에서 생겼다)
나머지 사정들은 충분히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 하지만 항상 우선순위를 차지하는 ‘저질 체력’만은 나로서도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의 문제였다. 자타공인 저질 체력 몸 상태의 비밀은 여행을 다녀온 7개월 후 받았던 건강 검진에서 밝혀졌다.
그날의 건강 검진이 생애... 처음이었다. 무서워서, 귀찮아서, 모르는 게 약이니까, 딱히 안 받아도 불이익이 없으니까 등등. 갖은 이유를 들어 회피형 인간답게 1N 년 동안 계속 피했다. 부모님께 받은 유전자가 특출 났는지, 단지 운이 좋았던 건지. 감기, 몸살을 제외하면 다행히 크게 아픈 적은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이대로 방치하면 안 된다는 조바심이 났다. 건강 보험료는 꼬박꼬박 내는데, 나중에 아프게 됐을 때 그 혜택을 못 볼 수도 있다는 말이 매년 다짐하고 매번 포기하는 ‘건강 검진’을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2024년 1월에 새긴 다짐이 실행에 겨우겨우 옮겨진 것은 그해가 다 가기 일보 직전인 11월 말. 그나마도 주변 사람들에게 새해 벽두부터 ‘나 올해는 꼭 건강 검진받을 거야’라고 거의 매일 떠벌리고 다닌 말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건강 검진 3일 후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어? 병원에서 왜?’
건강 검진은 처음이지만 보고 들은 것은 있어서, 검진 후 병원에서 전화가 오는 것은 좋지 않은 징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번에 한 피검사 있잖아요.
재검하셔야 될 것 같아요!”
‘헐... 내 피에 문제가 있다고?’
여행에서도 여러 경우의 수를 떠올렸듯 건강 검진 결과에 대해서도 여러 가정을 해두었지만 재검사는, 심지어 혈액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제가 많이 안 좋나요?”
“네. 이 정도면
일상 생활하면서도 많이 힘드셨을 것 같은데,
전혀 못 느끼셨어요?”
“(그 정도라고요?) 네.....”
“저번 건강 검진에서도 별 이상 없었나요?”
“아... 제가 이번이 건강 검진이 처음이라서요”
“아... 그러시구나”
“근데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게
안 좋게 나온 건가요?”
그녀의 대답을 듣기 전에 이미 머릿속에서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내가 순간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유명한 진단인 ‘백혈병’을 선고하고, 곧바로 마음의 준비에 들어갔다. 오늘 재검을 하면 일주일 후에 결과가 나오려나. 그럼 대학병원을 알아봐야겠지? 이래서 집안에 의사 한 명은 있어야 한다고 하는 거구나. 암보험이 하나도 없는데, 진작 들어둘걸. 근데 살도 안 빠졌고, 아무 증상 없이 이럴 수 있는 거야?
“빈혈이에요”
맥이 탁 풀렸다.
“정상 수치가 12인데 지금 9 정도 나왔어요”
수많은 가정 속에, 빈혈을 떠올린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게 어느 정도 나쁜 건지도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 그게 많이 안 좋은 건가요?”
“네, 10 이하는 반드시 치료받으셔야 해요”
첫 건강 검진이기도 하고, 비용 문제도 있고 해서 혈액 검사를 기본으로 선택했다. 빈혈 판정은 확실하지만 정확한 빈혈의 원인을 밝히고 치료를 하기 위해서는 세부 검사가 더 필요하단다. 피를 더 뽑을 필요는 없고, 추가 검사에 따른 비용이 발생하는 문제라 동의를 받으려고 전화를 한 거라고 했다. 1만 8천 원 정도가 더 나오는 게 무슨 대수겠는가. 가뿐한 마음으로 검사 결과가 나오는 3일 후 재방문 예약까지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 정도면 일상 생활하면서도 많이 힘드셨을 것 같은데...’ 이 말을 듣고 나니 그 무렵 가졌던 몇 가지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매일 반복되는 피로감이 진짜 어마어마했다. 의아했던 것은 전혀 피곤할 일이 없는데도 아침에 일어나면 ‘왜 이렇게 피곤하지?’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자동으로 나온다는 것. 단순히 찌뿌둥하다, 뻐근하다, 무겁다 같은 느낌과는 차원이 달랐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게감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싸고 짓누르는 느낌에 가까웠다. 한 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마사지기를 산 것도 그때였다. 특히 종아리가 혈액 순환이 안 되는 것 같다는 느낌이 확연했고, 그로 인해 근육까지 너무 아팠다.
식욕 부진도 심각했다. 없어도 너무 없었다. 흔히 말하는 ‘입맛 없다’ 정도가 아니었다.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무식욕 상태가 지속됐다. 단식을 하라고 해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제로 1일 1식을 하는 날이 태반도 넘었다. 그 1식마저도 먹어야 할 것 같아서 억지로 먹는 행위를 하는 것일 뿐, 맛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거울 볼 때나 사진을 찍을 때마다 내 얼굴에 여러 번 놀라기도 했다. 입술에 생기가 아예 없었다. 나이 탓이라고 여겼다. 나이를 먹으면 모든 것에 생기가 사라지는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가장 두드려졌던 입술의 창백함뿐 아니라 피부 상태도 심각했다. 화장이 안 먹는다 정도가 아니라 화장을 해도 피부가 수분 하나 없는 낙엽 같았다. 만지면 버석버석 소리가 날 것도 같았을 만큼 초췌했다. 갑자기 나이를 확 먹어버린 느낌. 모두 ‘나이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이해 안 될 일도 아니었다.
전부 빈혈 증상이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예사롭지 않게 본 ‘숨이 차는 증상’도 빈혈 증상 중 하나였다.
아주 오래전, 아마 고등학생 때쯤? 그냥 길을 걷다가도 혹은 계단을 오르다가도 아주 가끔은 가만히 있다가도 갑자기 심장이 몹시 빠르게 뛰면서 숨이 차는 증상이 있었다. 최초로 증상을 인지한 시점에는 심장이 순식간에 빨리 뛰니까 나에게 심장병이 있는 건 아닐까,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몇 분간 그러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런 일이 매우 드물지만 몇 차례 반복되자 심장병 의심은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자연스럽게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라고 치부했다. 뭐, 그 말도 틀린 건 아니지만.
빈혈이 있으면 체력 저하로 피로를 많이 느끼고 운동 능력도 감소한다. 혈액 속 헤모글로빈 부족으로 체내 산소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숨이 차는 증상이 생기고, 심하면 호흡 곤란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유 없이 숨이 찼던 증상의 최초 인지 시점과 평생을 저질 체력이라고 여기고 살아온 부분을 곰곰이 되짚어보면 ‘빈혈’이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된 것 같았다.
태어나길 마냥 저질 체력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나는 아픈 사람이었던 거다.
3일 후. 검사 결과를 확인하러 가는 길. 아주 오랜만에 숨이 가쁜 증상이 찾아왔다. 의사에게 다시 한번 확인했다. 내 예상대로 빈혈 때문이 맞을 거란다. 대체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병원을 찾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도. 검사 결과, 철분 결핍성 빈혈과 엽산 결핍성 빈혈 모두 있다고 했다. 두 달간 약을 먹어 보고 다시 피검사를 해보기로 했다.
처방 2주 후 12월, 뽈 언니와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 그러고 보니 이 여행도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다른 항공사 마일리지를 급하게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하하하. 일정은 이번에도 단순했다. 16.5km의 13코스와 19.5km의 14코스 완주. 이틀간 무려 6만 보를 걸어야 했던 여정에서 지금껏 한 번도 느낀 적 없던 놀라운 경험을 했다.
몸이 거뜬했다. 힘들지 않았다는 것도, 다리가 아프지 않았다는 것도 아니다. 너무 힘들고, 너무 아팠다. 그럼에도 지친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힘든 와중에 신났고, 아픈 와중에 콧노래가 나왔다. 지금껏 10여 차례 올레길 도전에서 완주를 실패한 적은 없었지만 매번 초반 4-5km를 지나면서부터는 급격한 체력 저하로 죽을 둥 살 둥 걸었던 나였는데,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심지어 나이는 한참이나 더 먹었는데 말이다.
플라세보 효과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빈혈이 나아지고 있음을 몸소 느꼈다. 또 한편으로 그동안 빈혈이 여행의 발목을 단단히 꽉 잡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이 나뿐 아니라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미쳤던 영향까지도. 메이 언니의 말이 생각난 것도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무언가를 거창하게 해 보기에는 하루가 거의 다 가버린 오후 4시 38분. 계획(!)대로 숙소 근처 시먼딩 투어를 하기로 한다. 오늘 나의 최종 목적지는 ‘용산사’. 숙소에서 걸어서 30분 거리. 하지만... 내가 용산사를 마주한 것은 오후 6시가 지나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