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혼여 #10 DAY 1_pm 06:22
약 280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사원, 용산사. 타이베이에서 가장 오래된 본존불인 불교의 관음보살과 도교의 여러 신이 함께 모셔져 있는 곳. 이곳에 반드시 오고 싶었던 이유가 이루고자 하는 무엇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단순히 관광객들에게 야경 맛집으로 손꼽히는 곳이어서였다.
6시를 목전에 두고 도착한 용산사. 체력은 이미 다 소진한 상태였다. 구경을 뒤로하고 용산사 정면이 잘 보이는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곳엔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나와 같은 자세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야경을 보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 야경을 기다리며 그곳을 오고 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이른바 ‘절멍(절을 보며 멍 때린다)’.
그 순간이 좋았다. 너무 좋았다. ‘절멍’이 왜 좋았는지 기억은 명확하지 않다. 어쩌면 걷느라 힘들었던 지침이 걷히고 체력이 회복되는 기분과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여행이 그랬듯 이유는 사라지고 그 순간의 행복만 남았기 때문일 수도, 또 어쩌면 실제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맞다. 생각을 멈출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아무것도 하지는 못하고 그저 생각만 많이 하던 나 자신에게 실망하는 날들이 하루하루 늘어가던 때였다. 그러다 내일로 미루고. 또 그다음 내일로. 그렇게 하루, 일주일, 한 달. 이미 5개월이 넘어가던 시점. 이대로라면 1년을 꼬박 채울지도 모르는 ‘홈프로텍터’ 생활. 그때의 나는 단순히 생각을 반복하는 것만이 나의 일인 것 마냥 열심히 하고 또 했지만 결코 어떤 결심도, 의지도 품지 못했다. 솔직히 품지 않았다.
나는 지금이 아닌 다른 것을 하고 싶지 않았고, 할 자신도 없었다. 마음에서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더 큰지, 자신 없는 것이 더 큰지 묻을 필요도, 알 필요도 없었다. 실은 자신 없다는 말로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보호하고 있던 거였으니까. 그런 채로 있으면 정작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그 무엇이었던 시절처럼 살 수 있다고 아니, 사람들에게 보일 거라는 그 헛됨을 믿으려 했던 것 같다.
‘절멍’을 하면서 나는 그런 나를 인정했다. 그 순간은 살짝 눈물이 났던 것도 같다. 내가 답답했던 것도. 미웠던 것도. 그러다가 조금은 안쓰럽기도 하다가 왜 이렇게밖에 살 수 없냐고. 더 잘할 수 있지 않냐고. 다독이기도 했던 것 같다.
용산사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듣던 대로 아름다웠다. 이 아름다움을 직접 보러 온 곳. 소원이 있어서 와야 했던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사이 소원이 생겼다. 간절한 마음으로 신께 빌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다면 정말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음을 감사하게 여기며 하루하루를 살겠다고.
여행 일주일 후 막내 작가 시절 메인 작가였던 쿠키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우리는 어쩌다 안부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그것도 몇 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내가 선배들을 잘 챙기는 후배는 아니었던 탓이다. 쿠키 언니의 첫마디는 전혀 예상 밖의 말이었다.
"돈 쓰면서 여행 다니니?"
백수에게 뼈를 때리는 말이었지만 어쩐지 아프지는 않고, 웃음이 났다. 어떻게 아셨냐는 나의 물음에 인스타보고 알았다고 했다. 한창 여행 사진과 영상을 업로드 중이었다. 언니는 내 피드를 보면서 ‘현진이가 요즘 일이 없구나’ 생각했단다.
"네, 언니. 그렇게 됐네요.
저도 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하하."
"돈 벌면서 여행 다니는 게 어때?"
용산사가 너무 좋았다고 결론 내린 게 ‘절멍’을 때리던 그때였는지, 아니면 쿠키 언니에게 새 프로그램 제안을 받은 순간이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쿠키 언니에게 전화가 오게 된 것은 용산사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여행지의 교회, 성당, 절, 모스크. 모든 곳에서 나름의 소원을 빌었지만 용산사에서의 내가 가장 솔직했고,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실질적 2박 3일의 일정에서 용산사를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간 것을 설명하기는 조금 어렵지 않을까.
최근 일 때문에 찾아오는 화를 밀물 썰물처럼 맞이하고, 잠재우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순전히 내 입장만 이야기하자면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우리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는 건지, ‘그의 프로그램’에 다른 사람들은 그냥 부품처럼 소비되고 있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음을 감사하게 여기며 하루하루를 살겠다, 빌었는데... 현재 상황에서 감사까지는 조금 어려울 것 같다. 솔직히 많이 벅차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에게 화를 내지 않고 참고, 이해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보는 것으로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이 정도는 신도 봐주시겠지......
'다음번에는 정말 감사하며 살게요.
부디 이번만은 익스큐즈 부탁드릴게요, 신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