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혼여 #11 DAY 1_pm 08:21
꼭 여행이 아니더라도 집 밖을 나서면 ‘웬만하면 걷자’는 주의다.
운동과는 담을 쌓은 삶. 게다가 집순이. 혹여 내가 사는 집이 궁궐같이 넓으면 몰라도 나는 원룸에 산다. 작은 원룸에서 움직여봤자지만 그마저도 온종일 가만히 앉아 있거나 누워있는 게 대부분. 그러니 여행지에서라도 걷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하면 평소 못 할 짓만 일삼는 내가 조금은 몸에 좋은 일을 하는 것 같았다. 호텔로 돌아가기 전 마사지받는 일정을 갑자기 끼워 넣은 것도 같은 이유다.
마사지샵까지 걸어서 8분. 버스로 8분. 전이라면 고민 없이 걷는 쪽을 택해야 했다. 웬만하면 걷자는 주의니까. 반나절 대만을 걸어보고 결심했다. 아열대성 해양 기후인 대만에서는 ‘웬만하면 타자’. 버스든. 택시든. 체력을 아끼는 것이 최선. 그러니 ‘웬만하면 걷겠다’는 원칙을 반드시 깨야만 했다. 8분 후에 도착한다는 버스. 그러면 걷는 게 나은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면서도 나는 깨버린 원칙을 다시 돌려세우지 않았다. 그때는 웬만했고, 지금은 웬만하지 않으니까.
‘웬만하다’. 일정한 기준이나 범위 안에서 크게 모자라거나 벗어나지 않은 상태. 혼자 행동할 때 ‘웬만하다’는 기준은 절대 문제를 일으키진 않는다. 오직 ‘나만’ 생각하면 되니까. 내가 갑자기 걷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나 다른 여행에서는 경비를 아끼려고 받지 않던 마사지를 받기로 한 것이나 기내식과 버블티로 끼니 전부를 해결한 것. 모두 웬만해서였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해야 할 때 ‘웬만하다’는 이기적으로 돌변하기 쉽다. ‘나에게는 웬만한 것’이 ‘상대에게는 웬만하지 않은 것’ 일 수도, ‘상대에게는 웬만한 것’이 ‘나에게는 웬만하지 않은 것’ 일 수도 있으니까.
최근 한 여행 프로그램을 보면서 나는 ‘웬만하다’라는 말로 포장한 진심이 얼마나 상대에게 폭력적일 수 있는지 완전히 깨달았다. 그 프로그램은 짝짓기 콘셉트의 방송에 나온 출연자들 중에서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나름의 사연이 있는 남녀가 함께 여행을 떠나는 스핀오프 리얼리티 프로그램이었다.
함께 여행을 하기로 한 커플의 프로필은 대략 이렇다. 여자는 평균 이하의 저질 체력. 이에 반해 남자는 평균을 훨씬 웃도는 체력의 소유자. 여자는 잠을 충분히 자고 쉬엄쉬엄 여행하는 스타일이라면 남자는 잠을 줄여서라도 최대한 많이 보는 여행을 선호. 여자는 끼니를 챙겨 먹어야 하는 편이지만 남자는 안 먹어도 상관없는 스타일. 여자는 여행에서 아끼지 말자는 주의인 반면 남자는 굳이 쓰지 않아도 되는 돈은 쓰지 말자는 주의. 여행 스타일만큼은 모든 것이 상극이라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닐 것 같았다.
내내 여행의 주도권은 남자가 ‘꽉’ 쥐고 있었다. 남자의 능력은 그러기에 충분했다. 그는 여행 계획 짜는 것에 능숙해 보였고, 언어도 유창했으며, 현지 사람들을 대하는 것에도 거침이 없는 등 여행자가 갖춰야 할 조건을 다 가지고 있었다. 그런 자신감이 있어서였을까. 그는 여자에게 줄곧 말한다.
“언제든 말만 해.”
내가 알기로 보통 이 말을 할 때는 자신이 상대를 배려하겠다, 따르겠다는 의미로 쓰이는데, 그는 달랐다. 글자 그대로였다. 여자는 언제든 말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여자의 말이 여행에서 반영되는 경우는 남자가 완전히 동의할 때만이었으며, 자기가 원하지 않는 쪽으로 말을 하면 ‘웬만하다’의 논리로 여자가 자신의 의중을 스스로 삭제하도록 했다.
'웬만하면 하나라도 더 보자'
'웬만하면 쓰지 말고 아끼자'
'웬만하면 먹지 말자'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대만 여행에서 나 자신에게 내가 수도 없이 한 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내가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웬만하다’의 기준을 오직 상대를 무너뜨릴 때만 썼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는 100전 100승. 승리는 모두 그의 것이었다. 왜냐하면 ‘웬만하다’는 자기 자신에게 들이미는 기준이지 상대에게 내미는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사용법은 전혀 달랐다.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만 적용했다. 그에게 ‘웬만하면’이라는 말을 받은 여자는 그가 아닌 자신에게 말한다. 웬만하면 내가 맞춰주자, 웬만하면 내가 참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되레 여자를 탓한다. 여자의 의견을 언제나 열심히 들었고, 자신은 다른 의견을 제시했을 뿐 결국 결정은 여자가 했다고. 그뿐 아니라 자기는 여행의 모든 것을 혼자 알아보고, 이끌었는데, 그런 자신에게 여자는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며 원망도 한다. 나는 결론을 내렸다. 웬만해서는 그가 스스로를 돌아볼 것 같지는 않다고.
럭키 드로우 당첨으로 뜻하지 않게 여행 자금에 큰(!) 여유가 생긴 나는 발마사지를 받으며 생각했다. 웬만하면 이제 마사지도 여행에서 자주 누려보자고. 그가 백전백승을 누렸듯, ‘웬만하면의 효과’는 엄청났다. 다음 날, 그다음 날도 발마사지를 받았다. 발마사지가 끝나자 몸이 너무 노곤해졌다. 이대로 침대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싶었다. 그때 다시 말했다. 그래도 여행 첫날밤인데, 웬만하면 맥주 한 캔 정도는 마셔야 하지 않겠냐고. 나는 또 못 이긴 척 '웬만하면의 유혹'에 넘어갔다.
웬만하다고 여기면 얼만든지 웬만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스스로의 몫. 그 누구도 타인에게 ‘웬만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