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혼여 #12 DAY 2_am 06:33
여행 둘째 날. 아침이라고 해야 할지, 새벽이라고 해야 할지. 그 어정쩡한 경계에 걸친 6시 반쯤 눈이 떠졌다. 기억에 의하면 대략 1여 년 전부터 수면의 질이 엄청난 속도로 떨어졌다. 살면서 불면증이라는 걸 거의 겪어본 적 없던 나였고, 한번 잠들면 7시간 정도는 깨지 않고 내리자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 무렵의 나는 빈혈 때문인지, 나이 때문인지 아니면 둘 다의 이유인지, 그것도 아닌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 속단할 수 없는 이유로 밤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해야 했다. 아무리 다시 자려고 해 봐도 그럴수록 정신은 점점 더 맑아졌을 뿐 아니라 예전에는 100% 성공률을 자랑하던 낮잠마저 전혀 ‘리콜’ 하지 못했기 때문에 수면 부족으로 인한 피곤도 달고 사는 중이었다.
내심 어젯밤 받은 발 마사지의 효과를 기대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이틀 전처럼 집이었다면 여전히 누워서 뒹구는 쪽을 택했겠지만 여행에서 마저 그럴 수는 없었다. 오늘의 계획은 홍마오청과 단수이 방문. 그것으로 하루를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으므로 일찍 깬 김에 아침에 진심이라는 대만 사람들을 따라나서기로 했다. 일정 추가를 위해 머리맡에 둔 핸드폰을 들었다.
원래는 아침밥을 먹지 않는다. 아, 원래가 아니구나. 부모님과 같이 살 때는 아침을 안 먹으면 큰일(!)이 나기 때문.... 실은 엄마가 다 차려줬기 때문에 먹기만 하면 됐으니까 아침을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먹지 않게 됐다. 첫 독립 이후 얼마 전까지 ‘아침잠’이 없는 지금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알람 소리에 겨우 잠을 떨쳐낼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밥과 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선택의 순간마다 식욕은 수면욕에게 매번 패배했다. 그런 날이 계속 이어져 아침을 먹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고 더 이상 식욕과 수면욕이 대결을 펼칠 필요도 없어졌다.
대만의 아침 식사하면 대표적으로 꼽히는 것이 또우장(豆漿). 대만식 두유이다. 대만 사람들은 보통 뜨겁게 데워진 또우장을 ‘요우티아오(油條)’라는 중국식 튀김빵에 찍어 먹는다. 또 하나의 대표적 아침 메뉴는 딴빙(蛋餅). 딴빙은 얇게 구운 크레페에 달걀을 얹고, 그 위에 햄, 치즈, 참치, 옥수수 등 다양한 재료를 선택해 넣어 먹는 음식이다.
여차저차 대만 사람들의 진심까지는 흉내 낼 수 있겠는데 맛집 도전까지는 끝내 내키지 않았다. ‘웨이팅’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보다 사람이 많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한국에서도 결코 좋아하지 않는 그 번잡스러움을 굳이 이곳에까지 와서 겪고 싶지 않았다. 물론 동반자가 있었다면 선택은 달라졌겠지만 혼자서 그 많은 사람들의 기운을 감당할 자신은 도저히 생기지 않았다. 내가 여행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맛집 탐방보다는 관광지 방문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탓도 클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아침은 숙소 주변에서 간단하게 해결하고 대신 저녁을 풍성하게 먹기로 마음먹었다. 맛집을 검색하다가 갑자기 ‘대만식 훠궈’에 꽂혔다. 생각해 보니 어제는 이렇다 하게 먹은 게 없기도 했고.
아직 혼밥이 흔하지 않은 우리나라에 비해 대만은 매우 자연스러운 식사 스타일. 게다가 1인용 핫팟을 먹을 수 있는 곳은 차고 넘쳤다. 다만 걱정되는 몇 가지가 있었다. 내가 혼밥 무경험자라는 사실. 방문했을 당시 자리가 없을 수도 있다는 불안함. 자리가 있어도 어쩌면 합석을 해야 한다는 어색함. 소통이 원활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확실성이 마음에 걸렸다.
이럴 때면 앞서 밝힌 나의 오랜 지병, 거대불안증식 병이 ‘안 되면 어떡하지?’ 증상을 더욱 활발히 작동시킨다. 기어이 ‘안 되면 말지’가 아니라 ‘안 되면 안 돼’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튀어나와 말썽을 부렸다. 사사건건 내 발목을 잡는 이 생각의 늪은 어떤 계기로 생긴 게 아니라 마치 처음부터 나와 함께 태어난 것 같았다. 내 인생의 모든 시작과 시도, 크고 작은 도전 앞에는 ‘안 되면 안 돼’가 드리운 겁과 두려움이 완전히 장악했고, 나는 대부분 거기에 완벽히 항복하는 쪽을 택했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내가 가장 잘 아는 비겁한 포기. 어차피 안 될 일이었어,라고 일일이 변명을 붙여야 하는 수고스러움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니, 꼭 필요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내가 덜 초라할 것 같았으니까.
어차피 안 되더라도 출발선에 다가가 보는 사람이 많을까. 어차피 안 될 거라며 결승선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사람이 많을까. 그리고 그건 정말 안 되기만 할 일이었을까. 어떤 기회를 그저 안 되는 일로 만들어 버린 것은 세상도, 사람들도 아닌 나 자신은 아니었을까.
‘안 되면 말지’를 다짐하는 사람과 ‘안 되면 안 돼’를 떠올리는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어쩌면 해 보는 과정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과 오롯이 결과에만 의미를 두는 사람일 수도. 혹은 실패를 인정할 수 있는 사람과 실패를 무조건 부정해야 하는 사람일 지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과 멈춰 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일 수도.
기로마다 무작정 ‘안 되면 안 돼’를 달고 사는 사람. 어떤 과정 없이는 그 어떤 결과 역시 없음에도 과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결과에만 치중하는 사람.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 인생의 실패자인 것 마냥, 앞으로 나아가다가 좌절을 당하느니 그럴 바에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편이 낫다고 여기는 사람.
전부 부정할 수 없는 나였다.
길고 긴 갈등 끝에 이번에는 ‘안 되면 말지’를 해 보자고 결심했다. 시간은 벌써 9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여전히 목적지는 불분명했지만 일단 나가보는 것으로 변심을 막아섰다. 난생처음 타지에서의 혼밥 도전. 여전히 두려웠다. 하지만 전과 달랐다. 두려움의 크기보다 설렘의 크기가 아주 조금 더 컸다. 아마도 여행이라는 단서를 달면 없던 용기도 생기는 여행의 효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