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혼여 #13 DAY 2_am 08:54
곧 방문할 브런치 카페는 내가 머무는 호텔에서 9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아주 이른 시간부터 문을 연다는 것. 주메뉴가 대만식 ‘토스트’라서 입맛에도 무난하게 맞을 것 같다는 것. 무엇보다 한국어가 가능한 직원이 있다는 것 등. 나로서는 선택을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막상 가게 앞에 도착하자 주저함이 문턱을 막았다. 코앞에 닥쳐온 ‘그러면 어떡하지’ 병에 대한 처방전을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두려움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상황 파악이 필수. 하지만 가게 내부 상황을 밖에서는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밖보다 안이 상대적으로 어두워 가까이 다가가야 알 수 있었는데, 마침 창가 자리에 앉은 손님이 밖을 보고 식사를 하고 있어 다가가 확인하기가 민망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다른 두려움들이 기다렸다는 듯, 줄줄이 가게와 나 사이로 허들을 세웠다. 들어갔는데 자리가 없다고 하면? 자리는 있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많으면? 그들 사이에서 주목을 끌어 주문을 할 수나 있을까? 기대했던 한국어 가능한 그 한 명의 직원이 오늘은 없으면? 그러다 결국 ‘크게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그냥 먹지 말까?’에 이르기 일보 직전 상태가 되었다.
생각해 보니 여행에서든 일상의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앞장선 적이 거의 없었다. 나보다 먼저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 뒤에 숨었다. 도전을 할 필요도, 모험을 할 필요도 없는 편이 마음 편했다. 어쩌다 가끔 내가 선두일 때도 지금처럼 망설이거나 곤란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나와 달리 ‘안 되면 말지’를 언제든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런 그들과 함께일 때면 나도 일시적으로나마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때의 나는 마치 갑 티슈의 휴지처럼 언제든 꺼낼 쓸 수 있는 용기를 품고 있는 사람 같았고, 지금처럼 아주 사소한 선택의 순간조차도 매번 대기시켜야 했던 ‘안 되면 어떡하지’하는 두려움 따위는 출발선에 설 필요도 없었다. 대신 그 자리는 그들에게 옮은 용기가 줄줄이 뽑혀 나왔다. 그런데 어째서 혼자일 때는 이토록 무력할까. 혼자일 때 더욱 필요한 것이 용기인데 왜 나는 그 반대일까.
아무래도 나는 ‘수동적 용기 보유자’인 것 같다.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닥쳐서 또는 타인의 작용을 받아 그 반작용으로 용기를 내는 사람 말이다. 이번 여행만 해도 항공사 마일리지 소멸이라는 상황이 없었으면 맹세코 시도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삶의 전부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분류해 보면 9:1의 비율로 절대적으로 수동적이었다. 그래서 좋은 점... 아니다. 나쁘지 않은 것도 있고, 후회되는 것도 있다. 크게 문제를 만든 적도, 문제가 되고자 한 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나라는 사람을 대표할 만한 성과를 낸 것 또한 없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고, 그래도 된다.
하지만 나는, 나와는 달랐기에 받아 들 수 있었던 다른 사람들의 결과에 대해서 부러워하는 것만큼은 무척이나 능동적이었다. 애쓰지 않아도 그런 마음은 갖기 너무 쉬웠다. 능동적을 넘어서서 적극적이기까지 했다. 한번 탐이 난 욕심은 내 안을 손쉽게 차지하고선 꿈쩍하지 않았다. 꼼짝없이 그 마음에 사로잡힌 순간 나는 대번에 못난 사람이 되곤 했다. 기회가 있었다면 나도 얼마든지 거머쥘 수 있는 것처럼 나 자신을 속여 부러움을 없애는 데 급급했다. 고작 ‘남들처럼’되고 싶은 성급한 욕망을 잠시 감췄을 뿐, 나는 절대 그들이 될 수 없었다.
내가 그들처럼 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기회가 있고, 없고 같은 기회의 불평등 때문이 아니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기회가 많지는 않았어도 없지도 않았다. 다만 기회가 와도 나는 ‘수동적 용기 보유자’ 답게 행동했을 뿐이다. 게다가 그들은 기회를 기다린 사람이 아니라 찾아다닌 사람들. 그러나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려왔다. 용기가 생기기를. 용기를 가진 사람이 되기를. 그래서 기회를 잡을 수 있기를.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결코...
용기는 생기지 않는다. 용기는 내야 하는 것이니까. 비어 있는 용기(容器)에 우리 스스로 채워 넣어야 하는 것이 용기(勇氣). 용기를 가진 채로 태어난 사람은 없다. 그래서 처음에는 우리 모두 공평했다.
우리를 ‘매사형 능동적 용기 보유자’와 ‘선택형 수동적 용기 보유자’ 그리고 ‘만사형 용기 무보유자’로 만든 차이는 결과가 무엇이 되든 계속 용기를 내보려고 노력한 사람과 용기 내보다가 자신의 애씀을 정산하는 과정에서 마이너스가 나는 쪽의 도전은 무조건 포기하는 사람, 애초에 한 번도 시도조차 하지 않았거나 끊임없이 시도했지만 돌아오는 게 아무것도 없어 결국 마음의 문을 닫게 된 사람인지도 모른다.
용기는 해보려는 마음. 용기는 결과가 될 수 없고, 결과를 만들어 낼 시작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용기를 낸 일 중 대부분 혹은 전부가 내 기대와 달리 소득 없이 끝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실패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용기를 실패나 성공으로 단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우리들의 용기에 불과하다. 분명한 것은 결과가 성공적이든 실패가 되든 그러한 경험만이 용기를 커지게 한다는 것. 용기가 단순히 가지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이어야 하는 이유다.
‘선택형 수동적 용기 보유자’로서 용기를 가진 사람이 아닌 용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그것도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망설임 없이.
문틈으로 겨우겨우 쥐어짜 낸 용기를 집어넣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내가 걱정했던 상황과는 모든 것이 반대였다. 창가 손님을 제외하고 테이블은 모조리 비어 있었고, 한국어 가능한 직원은 오늘도 출근해 있었다. 고작 한 거라곤 가게 안에 들어와 앉았을 뿐인데 기분이 너무 좋아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돈을 쓰러 왔지만 용기를 갖게 된다는 측면에서 나는 어제보다는 부자가 되어 가는 중이었다. 쓰면 쓸수록 사라지지 않고 점점 더 커지는 아이러니, 용기. 이번 기회에 차곡차곡 담아서 귀국해 볼까 싶다.
‘선택형 수동적 용기 보유자’에서 ‘노력형 무한 용기 재사용자’가 되기로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