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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 후에 남는 것.

대만 혼여 #14 DAY 2_am 09:14

by 현진

주문한 견과 버터 치즈 포크 에그 샌드위치와 사탕수수 아메리카노가 나왔다. 평소라면 전혀 선호하지 않는 메뉴. 포크를 제외한 견과, 버터, 치즈, 에그, 빵까지 모두 잘 먹지 않는다. 아메리카노는 좋아하지만 단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한국에서라면 ‘사탕수수’가 들어간 커피는 결단코 주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행자가 아닌가. 이왕 온 김에, 그리고 언제 여길 다시 또 올까 싶어 이 집의 베스트 메뉴라는 의미의 별표와 시그니처 표시까지 달아 둔 샌드위치와 커피를 기세 좋게 주문했다. ‘선택형 수동적 용기 보유자’에서 ‘노력형 무한 용기 재사용자’가 되기로 결심한 지 10여 분만에 도전을 주저하지 않는 나 자신이 살짝 뿌듯했다. 남들은 고작 그 정도로 도전이니, 모험이니 하냐고 하겠지만 나에게는 모험의 범주에 당당히 어깨 펴고 들어갈 수 있는 일이다.


‘새로움’에 나만큼 인색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내가 추구하는 삶을 한 단어로 말하라면 ‘안정’이다. 사람도, 상황도, 심지어 금전도 바뀌지 않고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나를 평화롭게 한다. 만나던 사람만 만나고. 먹던 메뉴만 먹고. 마트, 편의점, 미용실 등 다니던 가게만 가고. 이사를 하게 되더라도 되도록 살던 동네 안에서 움직이고. 호기심이 아예 없는 사람은 아닌데 ‘낯섦’이 주는 ‘불안’ 스트레스가 큰 것 같다.


그렇다고 무모할 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당장 며칠 전 주식이 상당히 최고 고점일 때. 지금껏 고작해야 반려주 개념으로 ‘S’ 전자 주식만 4년째 가지고 있던 사람이 본격적으로 주식 투자를 하기로 마음먹고, 곧바로 몇 가지 종목 사냥에 나섰다. 바로 그다음 날부터 주가는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산 주식은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도 모두 파란불이다. 하하하. 왜 안 하던 짓을 갑자기 해서 고통을 샀을까.


그러고 보니, 나는 ‘마음을 먹으면’ 잘... 까지는 모르겠고 당장 하는 사람이다.


그날 밤의 일도 그랬다. 김연아 선수를 알게 된 이후 나는 피겨 스케이팅의 점프를 구분하고 싶은 욕망에 한껏 사로잡혔다. 피겨 스케이팅의 액셀, 러츠, 룹, 토룹, 플립 점프. 분명 내 눈에는 모두 다 똑같은 점프로 보이는데 해설은 모두 다 다른 점프라고 말했다. 아무리 보고 또 봐도 같은 점프였다. 급기야 같은데 다르다고 말하는 해설이 잘못 말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절대 그럴 리는 없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거니 여겼다. 지금껏 배구, 농구, 야구 등 중계방송을 보면서 룰을 자연스럽게 터득했듯이 피겨 스케이팅도 보다 보면 점프를 구분할 수 있게 될 거라고. 물론 자신도 있었다. 완벽한 게임 ‘알못’에 게임도 전혀 할 줄 몰랐지만 스타크래프트 중계방송을 보는 것만으로 테란, 저그, 프로토스 세 종족의 특징과 유닛의 종류, 전세 읽기, 스타리그는 어떻게 운영되고, 어떤 팀이 있으며, 어떤 선수가 있는지 등 대부분을 파악해 낸 전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피겨 스케이팅은 그런 식으로는 불가능했다. 1년이 다 되도록 내 눈은 처음과 달라지지 못했다. 단순히 많이, 열심히 보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은 딱 하나. 다른 점프들과 뛰는 방향이 유일하게 다른 액셀 점프만 구분할 수 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사실이 무척이나 자존심 상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왜 이건 안 되지?

도대체 왜?’


의문에 답할 시간도 없었다. 순식간에 점프를 알아내야겠다는 일념이 나를 완전히 장악했다. 포털에 ‘피겨 스케이팅 점프 종류 구분 방법’ 검색어를 당장 욱여넣었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인터넷 세상에는 자신의 정보를 나눠주려는 선구자들이 너무나 많다. 나는 그 선배님들을 가능한 다 만나보기로 한다. 그렇게 오후 6시, 피겨 스케이팅 점프 공부가 시작됐다.


‘이제는 알겠다’라는 기분 좋은 착각이 들 무렵 시간은 무려 새벽 6시에 도착하기 직전이었다. 나한테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무려 12시간을 점프 구분에 매진한 것이다. 가장 공부를 많이 했던 고3 시절에도 이 정도로 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12시간 전 자존심 문제를 끌고 온 의문 뒤로 또 다른 의문이 줄을 섰다.


‘도대체 왜?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몰두한 거지?’


그로부터 십수 년이 지났지만 그날 밤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다만 그날을 시작으로 조금씩 더 적중률 높게 점프를 구분할 수 있게 됐고, 해설과 내 판단이 다른 적 또한 확연히 줄었기 때문에 해설의 자질을 의심할 필요도 더는 없었다. 당연하게도 해설의 도움 없이 스스로 점프를 구분할 수 있게 된 것이 내 삶의 어떠한 작은 반전도 불러오지 않았다. 그냥 그때는 못 했고, 지금은 할 수 있다는 사실만 달라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 또한 나뿐이다.


그냥 ‘내가’ 알고 싶었다. 그 누구도 아닌 나 말이다. ‘선택형 수동적 용기 보유자’로서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는 ‘마음을 먹는 일’이다. 무엇을 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누가 등 떠밀 수도, 대신할 수도 없는 일.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서. 스스로 싫다고 버티면... 아니, 매번 그런 식의 습관적 합리화로 회피하면 어쩔 도리가 없다. 마음먹는 일 따위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샌드위치는 바비큐 향이 나면서도 견과류 특유의 씹는 맛이 풍성했다. 처음 마셔 본 사탕수수 아메리카노는 헤이즐럿 향이 나는 커피 맛에 가까웠다. 나로서는 살짝 무도한 도전이었지만 어쨌거나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그리고 이 사소한 도전에서 깨달았다.


도전에 대한 결과는, 반드시 성공이나 실패가 아닌 선택만을 남겨도 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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