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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벗어나요

by 안개인듯

주말인 데다가 단풍철이어서 도로는 많이 붐볐다.

루아가 제 가족과 함께 요양원에 간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엄마도 오려면 와.


불과 며칠 전에 남편을 면회했던 터라 굳이 가고 싶진 않았으나 루아의 잔소리를 뒷감당하기 싫어 결정해 나선 길이었다.

평소보다 거의 두 배의 시간이 걸렸음에도 루아나 아기는 괜찮아 보였다. 아기는 초록색 우주복을 입고 있었는데 배 부분에 공룡의 이빨 같은 노랑 톱니가 달려서 귀여웠다. 남편의 녹색사랑을 염두에 둔 선택이 아니었나 싶었다.


그러나 막상 남편은 깊게 잠들어 있어서 우리가 있는 동안 깨어나지 않았다. 루아가 안타까워했지만 직원이 지난밤에 거의 못 주무셨단 말에 깨울 수도 없었다.


요즘엔 섬망이 심해지셔서 밤에 제어장치를 하고 있어요.

직원의 제어장치란 양손을 장갑에 끼워 고정해 놓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은 다 풀어놓은 상태이긴 하나 침대 옆에 걸려 있는 무명천이 내 손목을 옥죄는 것 같았다.


밖에서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하고 우리는 야외 정원으로 나왔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곳곳에 앉아 담소하고 있는 모습에 얼마 전 남편과의 만남이 생각났다.


“아빠는 이제 밖엔 못 나오실 것 같네. 많이 안 좋아 보였어. 그러니까 만날 수 있을 때 자주 만나야 되는데.”

잠든 아기를 유모차에 태워 사위에게 맡긴 루아는 한숨을 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아빠가 하는 얘기가 무슨 뜻인지 엄마는 알아?”

속눈썹을 연장해 길게 붙인 눈이 내 앞에서 껌뻑였다.

나는 어이없는 표정의 눈빛으로 루아를 쏘아보았다.


그러는 넌. 무슨 소리가 하고 싶어서.


“엄마는 처음 들었을지 몰라도 난 여러 번 들었어. 아빠 아프시기 전부터. 심지어 나한테 부탁까지 하셨는걸. 네 엄마를 자유롭게 해 주라고.”

난 하마터면 소리 내서 웃을 뻔했다. 간신히 참았으나 코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부녀는 도대체 무슨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걸까. 남편이나 루아나 나와 떨어져 산 세월이 없었고 도리어 루아의 유학 기간에는 남편과 나만 있었는데.


벗어나라더라.


아주 시니컬하게 최대한 무관심한 어조로 난 중얼거렸다.


“아니, 뭘 벗어나라고 한 건지 아냐고 엄마는!”

루아의 소리는 사뭇 잘못한 아이를 야단치는 선생의 어조였다.

격앙된 루아의 표정이 사나웠다.

저 애는 제 할머니를 닮았어. 나도 모르게 스치는 생각이었다.


그때 잠에서 깬 아기를 들고 사위가 다가왔다. 잠 깬 아기의 사랑스러움은 우리 모녀의 분위기를 무장해제 시켰다. 아기에게 우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하는 사이에 직원의 호출이 왔다. 남편이 깼으니 면회를 하겠느냐며 그러나 아직 대화할 형편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루아는 아기를 안고 우르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뒤따르는 사위와 나는 다른 집 식구 같았다.


“아빠, 나 루아야. 알아보겠어? 손자 리우잖아, 아빠가 지어준 이름을 불러줘야지.”

루아는 허공에 떠있는 남편의 시선에 어떻게든 자신의 모습을 고정시키려 애를 썼다.

여러 번을 부르고 흔든 끝에 남편은 눈을 잠시 감았다가 뜨며 잠꼬대처럼 한 단어만 말했다.


리우.


손자의 이름은 루아가 아이를 갖기도 전에 남편이 지어놓은 이름이었다. 아들이든 딸이든 리우가 좋겠다고 했다. 이로울 ‘이’에 비 ‘우’ 자인 리우는 ‘이롭게 하는 비’라는 뜻이었다. 사납게 몰아치거나 땅거죽만 적시는 는개가 아닌 적절한 때에 적당히 내리는 꼭 필요한 비와 같은 사람이 되라는 의미라고 긴 설명도 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자연히 사위의 성을 따라 ‘이리우’라고 했다. 그런데 루아가 놀림당하기 십상이라고 제 성씨인 서 씨를 붙여 ‘서리우’라고 한다며 한바탕 난리를 쳤다. 하지만 ‘서리우’도 비슷한 형편이라 결국 손자는 제 아비의 성씨를 따라가게 되었으니 어렵게 얻은 이름이었다.


이, 리, 우.


남편은 다시 성을 붙여 하나씩 소리 냈다.

저렇게 정신이 떠있는 상태에서도 아기가 보였는지, 아기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는 것이 신기했다. 며칠 전 내 질문에 답하던 그런 상태가 잠깐 돌아온 것인지도 몰랐다.

한동안 아기에게 머물렀던 남편의 시선은 한없이 따뜻했고 평화로웠다. 그 평안함은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남편은 다시 눈을 감고 잠에 빠졌다.

잠든 아빠 곁에 잠시 더 있겠다는 루아를 놓아두고 사위와 아기와 나는 밖으로 나갔다.


유모차를 끌며 사위와 야외 정원을 두어 바퀴 돌았다. 지나가던 노인과 직원들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가는 한 마디씩 하고 사라졌다.


어머, 아기다!


루아는 제 아빠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그냥 곁에 머물고 싶을 뿐인가.


나도 안다. 루아야. 내가 무엇에 갇혀 있는지. 그리고 벗어나야 한다는 것도.

그러나 그 감옥은 보이지 않아서 갇힌 줄도 몰랐었다.

나의 모든 것이 어떤 식으로든 통제되는 것을 느꼈을 때 남편은 처음으로 그 말을 했다.


‘고여숙 씨, 벗어나요. 고여준의 감옥에서.’


루아가 대학에 들어가고 살림에서 벗어난 나는 그림 대신 외국 여행을 미친 듯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돌아와서는 요리학원이나 강아지 미용학원이나 꽃꽂이나 제빵 교실을 전전했다. 건강은 나빠지고 잠 못 드는 날이 많아졌다. 갱년기가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남편의 진단은 확실했다.


“다시 그림 그려요. 내 아내 고여숙은 그림쟁이지.”


이사 와서 처음 공원에 오르던 날은 낯설었다. 부드러운 능선을 이루었던 어린 나무들은 커다란 숲을 이루었고 빽빽해져서 어두운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당시에는 하나뿐이었던 벤치가 공원 여기저기 자리하고 있었고 잘 다듬어진 잔디와 정돈된 산책로는 여기가 도시 속의 공원임을 뽐내고 있었다. 그러나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고는 해도 당시의 흔적은 조금씩 남아 있었다. 어떤 형체로서가 아닌 기억으로서.

그때 난 처음 숲에선지 하늘에선지 나는 소리를 들었다.


<돌아오라.>


주변에 사람들이 오가고는 있었지만 내게 돌아오라고 명령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어디로 돌아오라는 것인지 밑도 끝도 없는 소리였다.


<돌아오고 돌아오라.>


다시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무시하고 집으로 향했다. 일단 남편에게 나의 청력검사나 정신 감정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누구에게나 자신에게만 들리는 소리가 있어. 나도 그래. 아마 당신은 공원에서 영혼이 가장 맑은 모양이네. 걱정하지 말아요. 그냥 들리면 들어요.”

남편의 말은 나를 더 애매한 지경으로 몰아넣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소리가 계속 들리는 것도 아니고 그 소리를 증명할 만한 어떤 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러나 그 일이 있고 나서 공원에 가는 일이 별로 내키지 않았다. 무엇보다 어쩌면 여준이 어려서부터 소리를 들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유쾌하지 않았다.


이사하고도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남편이 이젤을 포함한 그림도구 일습을 택배로 주문했다. 여전히 골프네 수영이네 하며 이제는 스포츠를 핑계로 밖으로만 돌던 때였다.


“그림쟁이는 그림을 그려야지.”


남편이 이젤을 조립해서 세우는 모습을 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솟구쳤다.


그때였다. 공원에서 크로키를 그리기로 마음먹은 때가.


루아야, 그렇게 난 내 감옥을 나오기로 한 거야. 그런데 아직도 무엇인가는 갇혀있는 모양이다. 네 아빠나 네가 보았듯이.


아기는 다시 유모차에서 잠들었고 사위도 의자에 앉아 졸던 즈음에 루아가 나타났다.


“편안히 주무시기에 그냥 나왔어.”


잘했다. 더 할 얘기가 없었을 거야.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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