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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나에게 절필을 생각하게 한 작가, 누군가 봤더니 대문호 톨스토이님..

by 첫둘셋

이번 편은 마음에 드는 문장 필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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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겠어, 죽었는걸. 하지만 나는 아니잖아.' 그들은 저마다 이렇게 생각하거나 느꼈다. 가까운 지인들, 이른바 이반 일리치의 친구들은 이와 더불어 이제 예의상 몹시 따분한 의무를 다해야 하고 추도식에 참석하여 남편을 잃은 부인에게 조의를 표해야 한다는 떨떠름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10p


그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이반 일리치의 추도식 같은 사건조차 일련의 법정 절차를 어길 만한 충분한 동기로 인정받을 수 없다고, 가령 그 무엇도 오늘 저녁에 하인이 새 양초를 네 개 준비하는 동안 카드 한 벌을 뜯어서 섞는 일을 방해할 수 없다고, 이 죽음으로 인해 우리가 오늘 저녁을 유쾌하게 보내지 못할 까닭은 그다지 없으리라고 말이다. -13p


'꼬박 사흘에 걸친 끔찍한 고통과 죽음. 그건 지금, 어느 순간이든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생각에 그는 일순간 섬뜩해졌다. 하지만 당장 어찌할 바 모른 채 있으려니, 이 죽음은 자기가 아닌 이반 일리치에게 일어난 일이다, 자신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하고 일어날 수도 없으리라는 아주 상식적인 생각이 구원 투수처럼 떠올랐다. -17p


하지만 그녀는 이미 사소한 사항, 심지어 그도 모르는 내용까지, 예컨대 이런 경우에 국고에서 돈을 긁어낼 수 있는 모든 방도를 알고 있음이 훤히 보였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좀 더 많은 돈을 긁어낼 만한 방법이 없을지 궁금했던 거시다. -18p


그 경력이란 어떤 본질적인 직무 수행 능력이 딱히 없더라도 어쨌든 오랜 근속 연수와 관등 덕분에 쫓겨나지 않는 상황, 그리하여 일부러 고안해 낸 허구의 자리에 앉아 6000 루블에서 1만 루블에 이르기까지 허구가 아닌 돈을 받으며 늙어 죽을 때까지 죽치고 앉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21p


그가 생각하는 의무란 맨 윗사람들이 그렇다고 여기는 모든 것이었다. 어렸을 때도, 다 자랐을 때도 아첨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아주 젊은 시절부터 마치 빛을 쫓는 하루살이처럼 사교계의 가장 높은 사람들에게 이끌리고, 스스로 그들의 예법과 인생관을 배우며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쌓으려는 성향이 있었다. 유년과 청년 시절에 열광했던 것은 모두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 지나가 버렸다. 관능과 허영에 몰입했다가 급기야 고학년 때는 자유주의에도 심취했지만 전부 그가 감정적으로 정해 놓은 한도 안에서 그랬을 따름이다. -22p


이발 일리치는 두 가지 점을 모두 고려해서 결혼했다. 이를테면 이런 아내를 얻음으로써 자신을 위해 유쾌한 일을 하고, 그와 더불어 최상류 층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하는 것 말이다. -28p


그는 결혼 생활, 적어도 자기 아내와 함께 하는 결혼 생활이 유쾌하고 품격 있는 삶을 항상 보장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종종 파괴함을, 따라서 이런 파괴로부터 자신을 꼭 지켜야 함을 깨달았다. -29p


그래서 이반 일리치는 결혼 생활의 원칙을 정립했다. 가정생활에서는 오직 아내가 남편에게 제공할 수 있는 음식과 살림과 침대 같은 편의 사항만 요구했는데, 이 원칙의 핵심은 사회적 통념이 정해 놓은 외적 형식의 품격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명랑한 유쾌함은 그 밖의 영역에서 추구했으며, 그런 것을 찾아낼 때면 무척 감사히 여겼다. 혹시 저항이나 투정의 기미가 보이면 얼른 자기가 쌓아 놓은 별도의 세계로, 업무로 달아났고 거기서 유쾌함을 찾았다. -30p


만약 이반 일리치가 이런 상황을 이상하게 여겼다면 서로의 소원함에 마음이 아팠겠지만 그는 이미 이를 정상적인 상황일 뿐만 아니라 가정생활의 목표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목표란 저 불미스러운 일에서 더욱더 해방되어 생활에 무해하고 점잖은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을 줄임으로써 목표에 다다르려 했고, 꼭 필요할 때는 제삼의 인물을 동석시켜서 자신의 입지를 지키려고 애썼다. -31p


이반 일리치는 떠났고, 일의 성공과 화목한 부부 관계 덕분에 유쾌해진 기분은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키며 계속 그 곁을 맴돌았다. 새로 구한 집은 남편과 아내가 함께 꿈꾸던 모습 그대로 훌륭했다. -37p


그런데 본질적으로는 큰 부자는 아니지만 부자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공유하는 것이 있었다. 비단, 흑단, 꽃나무와 양탄자, 청동 조각품 등 하나같이 중후하고 광택이 화려한 물건들, 즉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또 다른 특정 부류의 사람들처럼 보이고 싶어서 갖추는 것들 말이다. 그의 집도 그런 집 안의 풍경과 너무 비슷했으므로 딱히 주의를 끌 만한 점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뭔가 특별해 보였다. -38p


그렇게 그들은 새로 단장한 집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항상 그렇듯이 아무리 살기 좋은 집이어도 딱 방 한 칸이 부족하기 마련이고, 또 수입이 늘어나도 딱 얼마가, 그러니까 500 루블 정도가 부족하긴 했지만 그래도 참 좋았다. 특히 집 단장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아서 뭘 더 사들이고 주문하고 재배치하고 다듬고 손봐야 할 것이 여전히 남아 있던 시절이 참 좋았다. -39p


이반 일리치는 사회적 신분이 높은 신사 숙녀를 불러서 조촐한 식사를 대접하기를 좋아했고, 또 그의 거실이 다른 모든 거실과 비슷하듯이, 자신의 일상이 그런 사람들이 시간을 보내는 방식과 비슷하다는 사실에 흡족해했다. -41p


업무상의 기쁨은 자존심의 기쁨이었고, 사회생활의 기쁨은 허영심의 기쁨이었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의 진정한 기쁨은 빈트 놀이의 기쁨이었다. 인생에서 어떤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더라도 다른 모든 사람들 앞에서 촛불처럼 환히 타오르는 기쁨이 하나 있다면 바로 마음에 맞는 좋은 친구들과 빈트 판을 벌이는 일, 반드시 네 명씩 짝을 지어 진지하게 머리를 굴려 가며 놀고 난 뒤에 저녁을 먹고 포도주를 한잔 하는 일이라고 그는 고백해더랬다. 빈트를 한 다음, 특히 판돈을 조금 따고(많이 따면 외려 불쾌하다.) 나서 잠자리에 들 때면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좋았다. -42p


이렇게 참아주는 행위를 프라스코비야 표도르브나는 대단한 위업이라 생각했고, 남편의 성격이 너무 끔찍해서 자기 인생 역시 불행해졌노라고 스스로 결론을 짓고 나니 스스로가 슬슬 불쌍하게 여겨졌다. 자신을 더 불쌍하게 여길수록 남편을 더욱 증오하게 되었다. 남편이 죽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으나, 그러면 봉급마저 사라질 테니 대놓고 바랄 수는 없었다. -45p


이 모든 절차는 그동안 이반 일리치가 피고에게 그토록 휘황찬란하게 늘어놓은 것과 완전히 똑같았다. 의사는 역시나 휘황찬란하게 요약해 준 다음, 안경을 살짝 내리고서 의기양양하고 즐겁게 피고를 내려다보았다. 의사의 요약문을 통해 이반 일리치는 나쁘다는, 즉 의사는, 아니 어쩌면 모든 사람 역시 관심 없을 테지만 자기 상태가 나쁘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47p


그러고는 정말 재수 없거나 거지 같은 일을 저지르고, 자신을 못살게 구는 사람들에게 성질을 부렸다. 이런 분노야말로 자기를 괴롭히고 있음을 느끼면서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주변 상황과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병세를 악화시킴을, 따라서 불쾌한 사건에는 신경을 꺼야 함을 그도 분명히 알았을 터다. 그런데 완전히 정반대의 결론에 이르렀다. 스스로 자기에게는 안정이 필요하다고 얘기하면서 그 안정을 파괴하는 모든 것에 관심을 주고, 그래서 안정이 조금이라도 파괴되면 다시 신경질을 냈다. 의학서를 읽고, 의사와 상담하다 보면 병세는 더욱 악화했다. -50p


뭔가 끔찍하고 낯선 것, 이반 일리치의 인생에서 지금껏 겪은 적 없는, 너무나 의미심장한 뭔가가 그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오직 자신만이 이 사실을 알 뿐, 주변 사람들은 모두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할 의지도 없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이전처럼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반 일리치는 그 점이 제일 괴로웠다. -51p


'문제는 맹장도 신장도 아니야, 삶과...... 죽음의 문제다. 그렇다, 삶이 있다가 지금 떠나는, 떠나는 중인데도 나는 그것을 붙잡아 둘 수 없다. 그렇다. 뭣하러 나 자신을 기만할 것인가? 내가 죽어 간다는 사실을 나만 빼고 모두 분명히 아는데. 문제는 오직 몇 주냐, 며칠이냐 하는 것 분이야. 어쩌면 지금일지도 모른다. 빛이 있었지만 바야흐로 암흑이다. 내가 여기에 있었는데 이제 저리로 가겠구나! 어디라고?' -59p


키제베터 논리학에서 배운 삼단 논법의 예를 따르자면 카이사르는 인간이다, 인간은 죽는다, 고로 카이사르도 죽는다,라고 했다. 그는 평생 이것이 카이사르에게만 해당하는 말이지 절대 자기에게는 적용되지 않으리라고 여겨왔다. 카이사르는 보편적 인간이므로 이것은 완벽히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카이사르 같은 보편적 인간이 아니라, 항상 모든 사람들과 다른, 완전히 특별한 존재였다. -62p


그는 죽음이 머무는 자리에 다른 생각들을 차례차례 불러들였고, 거기서 의지할 데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랐다. 여태껏 죽음에 대한 생각을 가려 주었던 지난날의 의식의 흐름 속으로 되돌아가려고 애썼다. 그런데 이상한 노릇이었다. 과거에는 죽음에 대한 의식을 감춰 주고 숨겨 주고 파괴했던 모든 것들이 이제 더는 어떤 효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64p


하지만 아내와 아들딸, 하인과 지인과 의사들, 무엇보다 그 스스로 깨달은 점이 있는데 바로 그에 관한 다른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란 결국 오직 그가 언제 자리를 비워 줄지, 그의 존재로 인한 저 억압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언제 해방될지, 또 그가 언제 저 고통에서 놓여날지에 쏠려 있다는 것이었다. -68p


이반 일리치를 제일 괴롭힌 것은 거짓이었다. 왠지 모두가 그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그저 아플 뿐 죽어 가는 것이 아니며, 잠자코 치료를 잘 받으면 뭔가 아주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고 묵인하는 거짓말 말이다. -72p


기나긴 고통을 맛본 뒤에 이반 일리치는 때때로 이렇게 고백하기가 창피스럽지만, 누구든 자기를 아픈 아이처럼 그저 불쌍히 여겨 주길 무엇보다 바랐다. 아이를 어루만지고 달래 주듯 상냥히 쓰다듬고 입을 맞추고 자신을 위해 울어 주길 바랐던 것이다. -74p


혼자 남은 이반 일리치는 참으로 끔찍한 통증보다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신음을 토해 냈다. '이렇게 밤낮없이, 끊임없이 전부 똑같을 바에나 차라리 어서 빨리. 차라리 뭐? 죽음, 암흑 말이다. 아니, 안된다. 어쨌든 이러는 게 죽음보다는 낫다!' -77p


똑같았다. 희망이 한 방울 반짝이는가 하면 절망의 바다가 휘몰아쳤다. 끊임없이 통증, 또 빌어먹을 통증이 밀려오고 마음은 계속, 계속 똑같이 괴로웠다. 혼자 있자니 무섭고 또 괴로워서 누구든 부르고 싶지만 정작 다른 사람이 곁에 있으면 더 나빠지리라는 사실을 미리부터 알았다. -78p


그와 그의 병을 향한 그녀의 태도는 한결같다. 의사가 환자를 대하기 위해 이미 벗어던질 수 없는 태도를 연마해 두었듯, 그녀 역시 그러했다. 그가 뭔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두 그의 잘못이다, 그래도 그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나무라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에 대한 이런 태도를 결코 벗어던질 수 없었다. -80p


결국 또다시 이미 그의 앞에 홀로 서 있는 삶과 죽음에 관한 실제적인 질문 대신에 신장과 맹장이 왜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지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고, 바야흐로 미하일 다닐로비치와 저명한 의사가 본격적으로 달려들어서 병을 고쳐 놓을 기세였다. -81p


누군가가 그를 비좁고 깊고 검은 자루 속에 아프도록 처박은 채 자꾸 더 안으로 쑤셔 넣지만 도무지 들어가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참으로 끔찍한 일이 그에게 고통스레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무섭기도 하고, 아예 그리로 나뒹굴고 싶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그냥 몸을 내맡기기도 했다. -86p


"사는 것? 어떻게 사는 것 말이지?" 영혼의 목소리가 물었다.

"그야 예전처럼 잘, 유쾌하게 사는 것 말이다."

"예전에는 어떻게 살았던가, 잘, 유쾌하게?" 목소리가 물었다. -88p


어린 시절에서 멀어질수록, 그리하여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그 기쁨들은 더 하찮고 의심쩍게 변했다. 법률 학교 시절부터 그랬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뭔가 진정으로 좋은 것이 있었다. 그때는 즐거움이 있었고, 우정이 있었고, 희망이 있었다. -89p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이따금 모두 자기가 잘못 살아서 일어난 일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당장 자기 삶은 모두 옳았노라고 회상하며 그는 이 이상한 생각을 떨쳐 버렸다. -91p


이게 뭔가? 정말로 죽음이라는 말인가? 그러자 내면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렇다, 정말이다. 이런 고통은 대체 왜? 그러자 또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냥 그런 거다, 아무 이유 없이, 그 밖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91p


자기가 삶을 잘못 살아왔다는, 예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그런 가정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가장 높은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에 맞서 투쟁하려는 충동, 그가 당장 떨쳐 내려했던 아득한 저 충동이야말로 진짜고 나머지느 모두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직장도, 삶의 방식도, 가족도, 사교계와 직장의 이해관계 또, 이 모든 것이 잘못되었을 수 있었다. -97p


그 사흘 내내 그에게는 시간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동안 보이지도 극복할 수도 없는 힘이 그를 예의 그 검은 자루에 마구 쑤셔 넣었고 그는 몸부림칠 뿐이었다. 형리의 손아귀에 잡힌 사형수처럼 자신이 구원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발버둥질을 해 댔다. -1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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