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20년, COVID-19라는 변수 때문에 집에서 강의를 듣게 되었던, 봄날의 기억이다. 세 학기째. 대학 수업이 익숙해질 무렵, 개강 첫 주 OT에서 의미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전공 담당이지만 처음 뵙게 된 교수님의 수업. 끝마치는 듯싶더니 갑자기 말을 이으셨다.
"저는요, 저는 여러분의 4년이 헛된 시간이 아니었으면 좋겠거든요. 이번에도 졸업논문 심사를 했어요, 했는데... 여러분, 4년이면 충분히 전문가라고 할 수 있거든요. 저는 여러분이 대학을 다녀서 얻은 결과물이, 충분히 가치 있는 문헌을 생산해 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쓴 시간이니까."
조심스러운, 그러나 강단이 무게중심을 꽉 잡고 있는 어조였다.
"... 혹시 제 생각에 동의하신다면, 그래, 이 수업에 2~3학년이 많잖아요? 1학년도 몇 있고... 2년, 길면 3년이면 충분하거든요. 제가 앞으로 공부 지도를 도와드릴 수 있으니까 혹시 관심이 있다면 제게 메일을 보내세요."
배곯는 피난길에 누군가 배낭에서 초콜릿 한 조각을 꺼낸다면, 다 같이 사막을 헤매는데 누군가 "저기, 저기 물이다!"라고 소리친다면, 이런 기분일까? 수업이 끝나고 나는 고민도 하지 않은 채 메일을 보냈다. 나는 공부를 해보고 싶고, 진지하다고. 이 진로를 쭉 따라가고 싶은 열정과 의지가 충분하다고. 자신 있다고.
교수님은 답장으로 '여태껏 공부한 내용들과 자신의 생각들, 그리고 읽어온 전공 서적들'을 적어오라고 말씀하셨다. 메일에 적힌 눈웃음(^^)은 실제 당신의 표정일 것만 같았다.
메일을 보낸 사람은 나까지 두 명이었다. 우리는 약속시간을 정해 교수님 연구실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학문 진로에 대한 여러 조언을 구했다.
나는 이때의 기억을 참 신기한 것으로 남겨두고 있다. 이날의 대화가 수년을 경유해서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 분은 지금 타 전공으로 대학원에 진학하셨다고 들었다. 그 전공은 그날 함께 나눈 대화와 고민 속에 있던 그것이었다. 내가 관심 있는 분야를 설명드리니, 당신께서 전공한 학자가 이와 관련된 저술을 한 적이 있다고 답하셨다. 당신은 책장 한편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그 책이 여기 있을 텐데." 빼곡한 원서들이 끄집어져 나왔다가, 제 자리를 찾아갔다. 불안했던 건 사실이다. 괜한 숙제가 생기는 건 아닐까.
"현재야, 불어 좀 하니?"
"아니요 교수님, 배우곤 있는데... 진전이 없어요. 옹알이에 가까운 것 같은데요."
"진전이 왜 없어? 하면 되는 걸."
나는 웃으며 군대부터 다녀오고 열심히 하겠다고 농담을 건넸다. 교수님의 표정이 굳었고, 그런 게 어딨냐며 야단을 치셨다. 풀이 죽어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내게 다시 따뜻한 말투가 다가왔다.
"『어린 왕자』, 읽을 수 있니? 프랑스 초등학생들 정도는 읽겠지. 그걸 읽을 수 있을 때까진 어학에 정진하도록 해. 철학 원서는 그다음이고. 그리고, 불어를 잘 못한다니 종이에 적어줄 테니까 도서관에 이 책이 있는지 찾아보렴."
그 책은 도서관에 없었다. 불어 원서이기도 하고, 워낙 지엽적인 책이니 없어도 이상할 게 아니었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관심도 없는 학자의 지엽적인 텍스트라니, 사절이다.
그랬던 그 책이 지금은 내 책장에 꽂혀있다. 그리고 큰 이변이 없다면 나는 석사과정 중에 그 저자를 전공할 것 같다. 4년을 돌고 돌아 묵혀진 숙제이다. 물론 내게 주가 되는 연구도구는 아니지만, 그날의 숙제가 4년 하고도 반년을 지나 여전히 주어져있는 셈이다.
폴 리쾨르, 『가브리엘 마르셀과 칼 야스퍼스』(1947). 부제는 '신비의 철학과 역설의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