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명이 [철학으로의 초대]인 수업이 있었다. 여전히 열리는 수업이다. 당시 나는 철학으로 가고 싶은데, 나에게는 도통 초대장이 오지 않는 것 같아 좌절하고 있었다. 내게 멘토 같았던 선배는 칸트를 읽겠다고 했다. 자신만의 뮤즈를 찾은 것이다. 내게도 그런 철학자가 생긴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왜 나는 그런 철학자를 찾지 못했는가 자책하고 있기도 했다. 초대장이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철학 수업을 듣고 싶었다. 교양 강의를 듣더라도 철학에 가까운 강의를 듣고 싶었던 거다. 그러니 [철학으로의 초대]라는 이름에 끌리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다행히 수강신청을 잘 끝냈고, 나는 그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교수님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분이셨다. 겉으로는 젊어 보이셨지만, 말씀에는 항상 지혜와 기품이 묻어 나왔다. 그 목소리를 들을 때면 굉장히 오랜 시간을 공부에 매진한 학자의 모습이 겹쳐졌다.
강의 교재는 『소피의 세계』라는 소설이었다. '요슈타인 가아더'라는 저자가 쓴 이 소설은 철학사의 흐름을 정직하게 따라가는, 그러나 소설인 특이한 책이다. 평범한 9살짜리 소녀에게 특이한 철학 선생님이 찾아온 스토리이다. 예측하기 어려운 전개 덕분에 이야기로서의 재미도 충분했다.
나는 이 버전의 번역서를 구입해서 소장하고 있다.
강의는 지정해 주신 부분을 읽어오면, 해당 부분에 쓰인 철학사의 사유들을 풀어주시는 방식이었다. 전공수업의 복습도 되고, 또 몰랐던 부분들도 새로이 알게 되어 매 주가 즐거웠다. 물론, 치기 어린 20살의 나는 선배와 낮술을 하고 수업에 들어가 내내 잠만 자기도 했지만 말이다.
어느 날 수업에서 '이성이 끝나는 지점에서 믿음(신앙)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철학자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런 학자 중 한 명이 '쇠얀 키르케고르'라는 말도 덧붙여주셨다. 그때 그 말이 어찌나 꽂히던지. 찾았다. 초대장이 내게도 온 것이다. 나는 그날 키르케고르의 저서들을 있는 대로 모두 구매했다. 초대된 곳이 낙원은 아니었다. 앞으로 일구어야 할 경작지 같다고 해야 할까. 이게 무슨 소리인지, 왜 글은 이따위로 썼는지를 고민하고 한탄하며 나날들을 보냈다.
1년이 지나고, 2020년 2학기에 나는 그 교수님의 강의를 다시 듣게 되었다. 강의보다 교수님의 이름 석자를 믿고 수강한 것이다. 내겐 초대장을 보내주신 분이시니까. 지지부진한 이 진도에 박차를 가할 방안을 이분께 얻어낼 수 있진 않을까 싶었다.
학기가 끝나갈 무렵 나는 교수님께 메일을 보냈다. '저는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고민이 너무 많아요.' 대충 이런 요지로 시작된 메일은 몇 차례나 주고받아졌다. 교수님은 현실적인 조언들을 많이 해주셨다. 교수로서의 조언이라기보다는 같은 길을 먼저 갔던 선배로서 해줄 수 있는 말들이었을 것이다. 끄트머리에는 이런 말을 쓰셨다.
"언젠가 현재씨한테 이런 메일을 받을 거라고 예상했어요. 공부를 계속한다면 잘 해낼 수 있으리라 믿어요. 제가 봐왔던 현재씨라면요^^. 세부 전공을 정하기엔 아직 이르지만, 그걸 정해야 할 날이 오면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은 분야로 나아가세요. 책을 읽다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밤을 지새울만한 이야기를 해주는 철학자를. 내가 공부를 하는 건지 일을 하는 건지 헷갈릴 때, 시간을 쪼개어 읽은 한 문장에서 '그래, 내가 이걸 공부하려고 이 고생을 하고 있지'와 같은 보상을 주는 학자를 찾아야 해요. 내면으로 침잠되어 대화할 수 있는 마음속의 선생님을 찾으시길, 공부는 고되고 오랜 길이니까."
나는 내가 잘하고 있는지 헷갈릴 때면 이 메일들을 찾아 읽는다. COVID-19만 아니었더라면 교수님과 식사라도 한 번 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날이 언젠간 돌고 돌아 찾아올 것만 같다. 교수님이 내 메일을 받아볼 것을 예상한 것처럼 말이다. 그때는 교수님께 그렇게 말씀을 드릴 것이다. "선생님, 제게 초대장을 주신 건 선생님이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