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레메 투어를 마친 다음날, 네브세히르로 이동하여 지하도시와 절벽수도원, 골짜기 등을 둘러보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지하도시 데린쿠유다. 데린쿠유는 튀르키예어로 '깊은 우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개미굴처럼 연결된 공간이 지하 80미터까지 뻗어 내려가며 상하좌우로 연결되어 있다. 이방인의 침입이 잦았던 오랜 옛날, 이곳 사람들은 부드러운 화산암을 부수어 동굴을 만들고 아래로 피신했다.
땅 속으로 들어가 본 건 특별한 여행이었다. 빛은 쉽게 사라졌고 통로는 간헐적으로 좁아졌다.
가이드가 말했다.
"놀라지 마세요. 여기에도 있을 건 다 있어요."
진짜였다. 우물이 있었고, 부엌이 있었고, 교회가 있었고, 묘지가 있었다.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공간이 존재했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자 방향을 상실했다. 높이도 깊이도 가늠이 안 됐다. 햇살에 바짝 마른 뽀송한 공기, 그런 공기가 없었다.
하늘로 솟아오를 수도, 물 위에 떠 있을 수도 없어 땅을 파 내려갔던 과거의 사람들.
가쁘게 내려앉은 산소를 붙잡고 뻐끔뻐끔 숨 쉬었을 사람들.
기다시피 해 좁은 구멍을 내려가다 보면 이런 곳에서 살 생각을 대체 어떻게 했을까 아득해진다.
인간은 왜 사는가? 대체 왜 이렇게까지 살려고 하는가?
여행하는 동안 나는 위화의 책 '원청'을 읽었다. 원청의 주인공인 린샹푸는 갓난아기를 낳고 사라진 아내를 찾아 고향을 떠난다. 그는 부모님의 유산을 싸들고 무작정 남쪽으로 향한다. 아내가 남쪽 마을 원청에서 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젖동냥을 하며 어린 딸을 키우고, 물난리와 폭설로 여러 번 죽을 뻔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나는 린샹푸가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만 낳고 떠난 아내를, 스치듯 왔다가 잠깐 머물렀던 아내를 왜 그리 찾아다닌단 말인가. 어디를 가도 아내를 본 사람은 없고, 아무리 찾아도 원청이라는 마을은 나타나지 않는다. 인생을 걸기에 너무 무모한 일이다.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원청은 어디에 있나? 그에게 원청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데린쿠유와 원청은 인간이 얼마나 간절히 살아가는지 보여준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침략과 전쟁, 자연재해와 같은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은 쉽게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린샹푸가 마음속에 품었던 '원청'처럼 아주 작은 희망만 있으면 사람은 생의 끈을 놓지 않고 길을 나설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거창하지 않은 이유로 삶을 지속한다.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것도 아니다. 떡볶이가 먹고 싶으니까, 키우는 강아지가 귀여워서, 가족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냥. 그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어쩌면 내가 삶을 너무 무겁게 여긴 건지도 모르겠다. 인정받고, 이름을 알리고, 한 분야의 최고가 되고 다른 이들이 우러러보는 훌륭한 일을 해야 한다고 믿었던 적도 있다. 그런 삶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정신건강을 위해 왜 사는지 고민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지만 평범한 나의 날들보다 더 빛나게 살아갈 누군가의 인생을 상상하면 문득 부럽다.
삶이 자주 휘둘린다. 나의 원청은 남의 말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묻고 싶다. 당신은 왜 사는가? 어디를 찾아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