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열등감
19세기 음악가 중 몇 안 되는 슈퍼금수저 멘델스존. 환경과 재능 모든 것을 다 갖춘 그였지만, 완벽주의적 성향을 가진 그는 40세도 안되어 질병으로 요절합니다. 그것도 극심한 스트레스와 과로가 원인이 되어 병을 얻게 됩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완벽주의로 내몰았을까요? 그는 누구로부터의 인정을 지속해서 갈망했던 것일까요?
그는 19세기 유럽 음악계를 빛내던 위대한 작곡가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출생 배경은 음악가로서의 삶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죠. 멘델스존은 단순한 부유한 가정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저명한 철학자 모세 멘델스존, 아버지는 유럽 전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은행가 아브라함 멘델스존이었습니다. 멘델스존의 가문은 음악과 철학, 금융 모두에서 깊은 뿌리를 가진 진정한 엘리트 집안이었죠.
음악가 펠릭스 멘델스존의 할아버지, 모세스 멘델스존(1729-1786)은 18세기 독일 계몽주의 철학자다. 18세기 계몽주의는 유럽에서 이성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철학적 움직임을 일으켰고, 이는 유대인에 대한 편견을 약간 완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모세스 멘델스존은 이 시기 독일 계몽주의 철학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유대인과 비유대인 간의 평등을 옹호하는 목소리를 내곤 했다.
멘델스존이 자란 환경은 경제적으로 매우 풍족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삶이 늘 순탄했던 건 아닙니다. 문제없는 인생 없듯이, 멘델스존의 삶에도 큰 장애물이 있었으니 바로 그가 유대인 출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19세기 초중반 유럽 사회는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만연해 있었습니다. 유대교와 기독교 간의 갈등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제한된 직업만을 허용받았습니다. 금융업과 상업만이 그들의 주된 생계 수단이었죠. 그런데 이로 인해 종종 탐욕스럽고 부덕하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멘델스존의 아버지 아브라함도 그런 시선을 피해 갈 수 없었죠. 그의 아버지가 1815년에 설립한 **Bankhaus Mendelssohn & Co.**는 당대 독일 베를린에서 중요한 금융기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멘델스존 가문은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금융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독일의 산업화에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정권이 들어서면서 멘델스존 가문에도 큰 위기가 찾아옵니다. 1811년, 멘델스존의 가족은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 때문에 함부르크에서 베를린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영국과 유럽 대륙 사이의 무역을 차단하고자 하는 나폴레옹의 전략이었지만, 이로 인해 유럽 대륙 내의 많은 상인과 은행가들이 큰 타격을 입습니다. 멘델스존 아버지의 은행은 독일을 중심으로 영국 및 여러 유럽 국가 간의 금융 거래와 무역을 지원하고 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했기에, 대륙봉쇄령을 우회하는 무역에 자금 지원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시기는 나폴레옹의 영향력이 매우 컸기 때문에, 멘델스존의 집안 또한 유럽 전역의 정치적, 경제적 불안정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나폴레옹의 영향권을 상대적으로 벗어나 프로이센의 영향권 하에 있던 베를린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경제적, 정치적 위기 앞에 멘델스존의 부모는 불안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 이주한 이듬해인 1812년 그의 아버지는 유대인의 특성이 매우 잘 드러나는 멘델스존이라는 성 대신에 바르톨디(Bartholdy)를 붙여 멘델스존 바르톨디(Medelsshon Bartholdy)로 이름을 바꿔버립니다. 유대교와의 인연을 끊고 새로운 사회에 어우러져 가족들을 보호하고 자하는 아버지의 첫 결단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이어 개신교로 개종을 선언합니다. 유대교를 벗어나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며 가족을 지키려는 필사적인 선택이었지요.
이러한 시대적 절박함이 있었지만 그의 가족은 금융업에서 큰 성공을 거둔 상류층으로서 당대의 지식인과 예술가들과의 교류도 잦았습니다. 실제 멘델스존은 당시 최고의 명성을 휘어잡었던 대문호 괴테를 만나 극찬을 받기도 합니다. 이 두 사람이 만났을 때, 한 사람은 12살의 어린 음악 천재,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72세의 독일 대문호였습니다. 여기 청년 라흐마니노프와 노인 톨스토이와의 만남처럼 흥미로운 만남이 또 있습니다. 상상해 보세요, 멘델스존과 괴테 이 둘의 만남은 어땠을까요?
때는 1821년 멘델스존은 그의 스승인 카를 프리드리히 첼터와 함께 괴테를 찾아가게 됩니다. 첼터는 괴테와 오랜 친구 사이였고, 자기가 가르치던 이 어린 음악 천재를 괴테에게 소개하고 싶었던 거죠.
괴테는 이미 72세의 나이로 독일 문학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멘델스존은 이제 막 천재적인 음악 재능을 꽃피우고 있던 어린 소년이었죠.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예술과 세대를 초월한 우정의 시작이었습니다.
멘델스존은 이미 어린 나이에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뽐내고 있었으니, 괴테도 그를 무척 궁금해했을 겁니다. 그날 멘델스존은 괴테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합니다. 괴테는 멘델스존의 연주에 완전히 빠져들게 되는데, 72세의 할아버지였던 괴테는 이 어린 소년이 펼치는 음악의 아름다움에 깊이 감동받습니다. 괴테는 너무 놀라워서 이 어린 소년이 12살밖에 되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감탄했죠. 이렇게 세대와 장르를 초월한 괴테와 멘델스존의 우정이 시작된 멋진 순간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남다른 천재성을 보였던 멘델스존은 완벽주의자로서도 유명했습니다. 작은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았죠. 그의 작품 <Rondo Brillante>를 작곡하던 때였습니다. 당시 멘델스존은 25세였고, 이미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로서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의 나이에 비해 이룬 성과는 가히 놀라웠죠. 17세의 나이에 완성한 <A Midsummer Night's Dream, Op. 21 (Overture)한 여름밤의 꿈 서곡>은 그를 일약 천재로 만들어주었고, 그는 당시 낭만주의 음악계에서 중요한 인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Rondo Brillante>를 작곡하던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했습니다. 그 곡을 자신의 친구이자 멘토인 이그나츠 모셸레스의 아내에게 헌정했지만, 스스로는 부족하다고 느끼며 작품의 질에 대한 우려를 표현하곤 했죠. 그가 남긴 편지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제 자신이 피아노를 위한 새로운 구절에 대해 부족하다는 사실이 매우 크게 다가왔습니다. 이 점이 바로 제가 머뭇거리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이유이며, 당신도 이런 저를 눈치채실까 두렵기도 합니다. 다른 면에서는 제가 좋아하는 부분도 많고, 몇몇 구절은 정말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체계적이고 평온한 곡을 작곡하는 법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지난봄에 그렇게 하라고 강력히 조언해 주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이렇게 비판해 봐야 소용없으니 열심히 작업 중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제가 건강하고 기운이 좋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Felix Mendelssohn이 1834년에 마담 모셸레스에게 보낸 이 편지는 그의 자기 의심과 예술적 고뇌를 잘 드러냅니다. 그는 자신의 '피아노를 위한 새로운 구절의 부족함'에 대해 솔직하게 언급하며, 이 점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Rondo Brilliante>를 그녀에게 헌정하고 싶지만, 자신의 부족함이 눈에 띌까 두려워합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 스스로 끊임없이 의심하고 수정하기를 반복해 나아가는 완벽주의적 성향이 보입니다. 그는 늘 이렇게 스스로에게 끝없이 채찍질하며 끝없는 완벽을 추구합니다.
멘델스존은 자신의 사회적 배경과 음악적 명성으로 인해 끊임없이 높은 기대를 받았습니다. 칭찬을 받아도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고, 더 나은 결과를 위해 스스로에게 높은 기준을 부과했죠. 이로 인해 그는 늘 긴장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내 슬픔과 우울함이 덜했으면 좋겠어요. 가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다가오는 봄과 따뜻한 날씨가 저를 위로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멘델스존이 그의 누나 Fanny Hensel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고백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내면에는 차분하고 침착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끝없는 불안과 고뇌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 불안감은 결국 그를 과로와 스트레스로 몰아넣었고, 이는 그의 건강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멘델스존은 38세의 젊은 나이에 극심한 스트레스와 과로로 인한 질병으로 사망합니다. 천재 음악가였고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끊임없이 더 완벽해지기 위한 갈망과 고뇌 속에서 살았습니다. 뿌리 깊은 유대인 가문이었지만 유대인임을 부정해야만 했던 그였기에, 어쩌면 그의 작품에 대한 인정에 늘 목말라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향한 엄격한 기준과 끊임없는 노력이 이끈 예술적 성취 멘델스존의 삶을 통해 우리는 완벽주의의 양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뛰어난 예술적 성취 뒤에 깊은 고뇌와 자기비판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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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ndelssohn: Overture "A Midsummer Night's Dream", Op. 21
Boston Symphony Orchestra · Seiji Ozawa · Felix Mendelssohn Mendelssohn: A Midsummer Night's Dream ℗ 1994 Deutsche Grammophon GmbH, Berlin
Released on: 1994-01-01 Studio Personnel, Balance Engineer: Hans-Peter Schweigmann Composer: Felix Mendelssohn
Mendelssohn: Overture "A Midsummer Night's Dream", Op. 21 (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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