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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by 요니

박스를 연다. 네모난 상자 안에 나무로 된 과일과 채소들이 각각 비닐 포장되어 있다. 나는 비닐을 하나씩 벗겨내 천으로 닦는다. 단단하고 매끄럽다. 과일들은 두 개나 세 개의 나무토막으로 나뉜다. 중앙에는 원형 자석이 붙어 있다. 나무칼에도 쉽게 잘리고, 다시 합치면 찰싹하고 달라붙는다. 나는 닦으면서 여러 번 떼었다가 붙이기를 반복한다. 당근, 토마토, 수박, 사과, 칼과 도마까지 모두 열여섯 개를 닦았다. 아이 앞에 나무 상자를 가져다 놓는다.


비닐을 만지작거리던 아이의 시선이 상자 속으로 간다. 아이는 나무 상자에 손을 뻗었다. 동그란 것을 집어 들었다. 복숭아다. 아이는 유심히 손에 쥔 것을 살피다가, 팔을 들고 좌우로 크게 흔들었다. 곧이어 바닥에 내던졌다. 동그란 복숭아가 반으로 쪼개졌다. 나는 바닥에서 나무 조각을 집었다. 매끄러운 표면을 만지며 말했다.


"도아야, 이거 복숭아야. 복숭아. 도아가 뱃속에 있었을 때 엄마가 많이 먹었던 거."




작년 여름, 늘 냉장고에는 복숭아가 박스째 놓여 있었다. 아침마다 눈을 비비며 복숭아를 깎는 게 일상이었다. 복숭아 두 알을 먹기 좋게 깎아 봉지에 넣고, 출근하는 차 안에서 남편과 나눠 먹었다. 복숭아를 아예 먹지 않았던 내가 밥처럼 복숭아를 먹다니. 어쩌면 호르몬이나 입덧 때문이 아니라, 아이가 남편을 닮아서 그런 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둘의 유전자를 반씩 나눴으니 어쩌면 아이 식성이 그런 것일지도 몰라" 하고 남편은 말했다.


복숭아가 꿈에 나오기도 했다. 호화로운 파티장이었다.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잔을 들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거렸고, 긴 테이블에 음식이 가득 놓여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음식들이 모두 흑백으로 보였다. 이상하다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카롱처럼 달콤한 것들도 보였지만 손이 가지 않았다. 그때 멀리서 선명한 분홍색이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탐스러운 납작 복숭아가 케이크처럼 예쁘게 쌓여 있었다. 진한 분홍색에 향기까지 나는 듯했다. 나는 더 가까이 보기 위해 하나를 집으려고 손을 가져가는 순간 잠에서 깼다. 복숭아를 많이 먹어서 그런 꿈까지 꾼 건가 싶었는데, 그다음 날 아이가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납작 복숭아였는지 모를 일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선명하게 그 장면이 기억난다. 그때부터 나는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복숭아'와 연관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도아의 '도'는 복숭아라는 한자는 아니다. 다만, 어느 정도의 사심은 담겨 지은 이름이다. 그리고 아이에게 복숭아를 줄 날만을 기다렸다.


도아가 이유식에 익숙해지고, 과일도 조금씩 먹기 시작했을 때 나는 복숭아를 꺼냈다. 작게 자르고 으깨서 작은 접시에 담았다. 의자에 앉아 있은 도아는 곧바로 접시에 놓인 복숭아를 집으려 했다. 하지만 미끌거리는 탓에 작은 손에서 쉽게 빠져나갔다. 가까스로 입에 복숭아가 들어갔다. 아이의 얼굴이 구겨졌다. 가늘게 뜬 눈이 조금씩 커졌다. 스스로 손을 뻗어 복숭아를 다시 쥐었다.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얼마 뒤 빈 그릇을 들고 웃는 아이를 보며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반은 바닥에 떨어졌지만, 그래도 웃음이 났다.


나는 복숭아를 작년처럼 먹지 않는다. 복숭아보단 수박을 좋아하는 나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제 복숭아를 보면 아이의 얼굴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나무로 된 복숭아를 만지작거리면서도 미소가 지어진다. 혼자만의 연결고리인 셈이다. 나중에 아이가 크고 나서 "내가 너를 가졌을 때 나는 참 복숭아를 좋아했어"라고 말해도, 아이는 심드렁할지도 모른다. 아이에게는 기억조차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이와의 처음을 복숭아로 기억한다. 달콤하고 말랑한 기억이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길 바라며, 아이가 지겨워해도 여러 번 말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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