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가시지 않은 무더운 날씨였다. 스튜디오 문을 여니 잔잔한 팝송이 흘러나왔다. 애플 로고가 새겨진 모니터 두 대 옆으로 간이 칸막이가 보였다. 칸막이 입구로 들어서니 벽 반대편으로 DSLR 카메라가 고정돼 있었다. 그 위로는 조명 한 대가, 옆으로는 촬영된 사진을 확인할 수 있는 모니터가 빛났다. 포즈를 참고할 수 있도록 아이패드도 걸려있었다.
작년 9월 중순, 만삭 모습을 남겨두고 싶어 셀프 스튜디오를 예약했다. 30분 동안 무선 리모컨으로 사진을 찍고 마음에 드는 사진 2장을 고르면 됐다. 보정된 2장을 실물 사진과 디지털 파일로 받아 볼 수 있는데 증명사진 2명 값이라 부담스럽지 않았다.
우리는 간단히 조작 방법을 설명 듣고 카메라 앞에 섰다. 30분 타이머가 맞춰졌다. 한동안 어떻게 포즈를 취할지 몰라 참고용으로 놓인 아이패드로 사진을 살폈다. 시간은 지체 없이 흘렀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가져온 초음파 입체 영상 사진, 아기 신발, 주변에 놓인 기본 소품들까지 쓰고 있었지만, '이게 아닌데' 싶은 생각이 몰려들었다. 그때 등 뒤에서 사진을 찍고 있던 남편이 선반으로 향했다. 소품 하나를 들고 와 내 옆에 무릎을 꿇었다. 내 부른 배 가까이 붉은 장미 한 송이를 건넸다. 나는 남편을 보고 웃었다. 그렇게 우리의 첫 가족사진이 생겼다.
올해 다시 스튜디오를 찾은 건 작년에 들은 한마디 말 때문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다시 오시면 추가 인원 비용을 빼 드려요."
가볍게 스치듯 지나간 말이었지만 귀가 솔깃했다. 돈 때문이 아니었다. 1년 후에 아이가 태어나고 같은 곳에서 가족사진을 찍는다는 아이디어 자체가 멋지게 느껴졌었다. 사진을 건네받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캘린더 앱을 열어 다음 해 9월에 '가족사진'이라고 저장했다. 그리고 올해 도아와 시간을 보내며 까맣게 잊고 있다, 바람이 차가워지자 불현듯 생각났다.
예약은 쉬웠지만 촬영 당일에는 스튜디오에 가기 전부터 정신이 없었다. 아이는 요즘 엄마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옷을 입는 와중에도, 화장을 할 때도 도아가 "엄마, 엄마" 부르며 내 다리를 잡고 섰다. 컨디션도 좋지 않아, 평소보다 더 칭얼거렸다. 더욱이 아침에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탓에 도아는 스튜디오에 도착하자마자 졸려 하기 시작했다.
이마의 땀을 닦고 카메라 앞에 섰다. 전날 참고할 만한 포즈 몇 장을 저장해 놓고 보고 온 덕분에 이번에는 아이패드를 보지 않았다. 셔터 누르는 횟수도 줄였다. 포즈 하나를 정하면 거기서 미세한 변화만 조금씩 줬다. 고개를 조금 돌리는 정도였다. 도아는 칭얼거리면서도 거울과 카메라에 호기심이 생겼는지 중간중간 잘 웃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편해졌다. 나중 되자 남편이 의자를 가져왔다. 나는 의자에 앉아 도아를 배 위에 앉혔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아이에게 분홍색 꽃을 건넸다. 도아의 손이 꽃을 향해 다가갔다.
사진을 고르고 나서 주인이 말했다.
"1년 전과 같은 포즈로 잘 찍으셨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똑같은 위치에 같은 포즈였다. 이번에는 액자에 걸어 놓을 셈으로 A4 8컷 포스터도 추가로 구매했다. 컴퓨터로 포스터 수정 작업을 하던 주인이 물었다.
"포스터 중앙에 남길 문장 하나를 떠올려 주세요."
머리가 하얘졌다. 한 문장이라니. 어떤 말을 남겨야 하나. 한참을 뒤에서 끙끙대던 내가 안쓰러웠는지 그는 아이의 태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용꾸리요"라고 작게 대답했다. 우리 부부의 애칭을 합친 이름이었는데 오랫동안 입으로 내뱉지 않았더니 쑥스러웠다. 주인은 '용꾸리에게서 도아로'라고 적었다. 문구 옆에는 작년에 찍은 사진이 왼쪽으로, 오른쪽에는 이번에 찍은 사진이 놓였다. 그때 갑자기 한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안녕 용꾸리
안녕 도아
1년 전 아이에게, 지금의 아이에게 "안녕"이라고 다정히 말해주자. 어서 와, 환영해, 만나서 기쁘다는 마음을 꾹꾹 담아서. 낯간지럽고 유치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만 볼 가족사진이니 뭐 어떤가 싶었다. 출력된 사진을 건네받아 아이에게 보여줬다. 아이는 사진을 물끄러미 보더니 "엄마" 하고 말했다. 옆에 있던 남편은 "도아야 아빠는 어딨어, 아빠"라며 자신을 불러주지 않는다며 툴툴거렸다. 그런 둘을 보며 웃음이 났다.
집에 돌아온 후 작년 사진과 올해 찍은 사진 두 장을 아크릴 액자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A4 크기의 포스터도 액자를 찾아 넣었다. 작년 이맘때쯤은 더웠는지 우리 둘 다 반팔 차림이다. 올해는 긴팔을 입었다. 왼쪽에는 불룩한 배가, 오른쪽 사진에는 하얀 레이스가 달린 옷을 입은 아이가 남편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용꾸리라는 이름이 익숙했던 과거와 도아라는 이름이 익숙한 지금이 있다. 나는 포스터 중앙에 적힌 문장을 속으로 읽었다. 이 사진들은 현관 콘솔테이블 위에 오래도록 놓여 있을 것이다. 아무 탈 없이 편안하게 계속 놓여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