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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디톡스2

by 요니

저번 주에 이어 기록 정리 중이다. 하다 보니 재미가 붙어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빠져들고 있다. 휴대폰 사진첩 사진은 14,000장에서 6,900장으로 줄었다. 아이 사진과 동영상은 아예 손도 못 댔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성과다. 하다 보니 요령도 생겼다. 섬네일 목록만 봐도 무엇을 지울지 감이 잡힌다. 셀카는 마음에 드는 표정 위주로 두세 장만 남기고, 음식이나 배경 사진은 한 장만 남겨 놓거나 지운다. 필요 없는 스크린샷은 지우고, 언젠가 필요한 기록은 메모로 옮겨 놓았다. 찬찬히 보면 왜 찍었나 싶은 사진도, 흔들려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사진도 제법 많았다. 마치 언제 사 두었는지 알 수 없는 원피스를 옷장에서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기록 역시 물건을 비우는 것과 비슷했다. 같은 '정리'라는 범주에 포함되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진 정리가 주는 직접적인 이점은 용량 절약이겠지만, 그보다는 더 많은 장점이 있다.


더 이상 불필요한, 덜 중요한 것들

사진첩에서 가장 많이 지운 것은 중복된 인물 사진이다. 똑같은 장소에서 이유 없이 수십 컷을 눌러 대다 보니 생긴 결과였다. 당시 얻어걸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셔터를 눌렀겠지만, 막상 놓고 보니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찾는 게 힘들었다. A컷과 B컷이 마구 섞여 있으니 정작 중요한 게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 정리를 하고 나서야 무엇이 좋은지 알게 된 것 같다. 음식 사진은 내게 별 의미가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좋아하는 사람 얼굴이 담긴 사진은 B컷을 지우는 것도 망설였지만 음식 사진은 전혀 감흥이 없었다. 모두 지워도 괜찮을 정도였다. 어쩌면 맛을 기록하기에는 내게 사진보다는 글이 맞는 듯하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알게 된 것도 좋지만, 무엇이 덜 중요한지 알게 된 것이 어쩌면 더 큰 이득 같다. 앞으로도 기록을 남길 때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할지 알게 됐으니까.


사치스럽고 의미 있는 시간 보내기

요즘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면 아침에는 책상에 앉는다. 보통 글을 쓰거나 개인 일을 한다. 세 시간 정도 지나면 점심을 먹고 집안일을 한다. 그다음 하원한 아이와 다시 놀아주고 휴대폰을 본다. 하루 스크린 타임은 보통 세 시간인데, 적지 않은 시간이다. 메신저, SNS, eBook, 웹툰, 쇼핑 정도가 주를 이룬다. 솔직히 SNS 구경과 쇼핑을 즐기는 건 아니다. 그저 굳은살처럼 오래 반복하다 보니 생긴 습관이랄까. 이번 주는 휴대폰을 열면 사진첩 정리를 했다. 오래된 사진들 한 장을 보고 지우는, 엄지만으로 하는 단순한 작업을 하면서 이번 한 주는 무척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고 느꼈다. 마치 좋아하는 영화를 여러 번 보는 일처럼 사치스럽게 느껴졌달까. 과거 향수에 흠뻑 빠져드는 일이 일생에 몇 번 있을까 생각했는데 요즘이 그 시기인 듯했다. 다만 사진만 쭉 보는 것이었다면 추억 여행으로 끝났겠지만, 무엇이 더 소중한지 생각하며 정리 하자 보람은 덤으로 생겼다.


나를 더 잘 알게 된다

지금까지 글쓰기와 메모만이 나를 더 잘 알게 해준다고 생각했었다. 기록에 대해서도 메모와 글쓰기로 한정적으로 생각했었다. 정리 또한 메모 앱이나 종이 메모 같은 것만 신경 썼었다. 이번에 사진첩을 정리하면서 알게 됐다. 셀카와 여행 사진, 음식 사진 사이사이에 내가 반복적으로 찍은 것들이나 관찰한 것들이 나를 더 잘 알게 해준다는 것을. 시각적이기 때문에 글보다 더 빨리, 확실하게 전해지는 것도 있다는 것을. 과거의 나이지만 거리감이 존재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지점도 있었다.


이런 매력 때문에 나는 내친김에 클라우드 폴더도 건드리고 있다. 터져 나갈 듯한 배낭처럼 잡동사니 파일과 사진으로 꽉 차 있어 건드릴 때 심호흡을 두 번 하긴 했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나는 돈을 내고 용량을 늘릴지 고민하지 않았던가. 마치 집안에 잡동사니를 정리하지도 않고 평수부터 늘리려고만 했던 것이다. 지금은 다르다. 기록만큼 정리도 중요하다는 걸, 그 기록은 당장 손에 든 것부터 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클라우드에는 2012년부터 2017년까지 3만 장의 사진이 남아 있다. 나는 휴대폰을 열어 필요없는 것을 지우기 시작한다.



* 쓰다보니 육아에세이가 아니게 되버렸네요. 오늘은 이 글만 올라옵니다. 여전히 아기 사진은 잘 못지우겠습니다만.. 그래도 옛날 사진 정리후에 시도해볼 계획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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