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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소록 Sep 24. 2024

한때 완전했던 인간, 모든 ‘에브리맨’의 황혼에 대하여

필립 로스 장편소설  『에브리맨』

"목적 없는 낮과 불확실한 밤과 신체적 쇠약을 무력하게 견디는 일과 말기에 이른 슬픔과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일. 결국 이렇게 되는 거야. … 이거야 미리 알 도리가 없는 거지." (p.167)


『에브리맨』, 필립 로스, 문학동네 

『에브리맨『에브리맨』

그는 건강하고 자신만만한 남자였다. 광고 아트디렉터라는 직업에서도 성공한 위치에 올랐고, 언제라도 원하는 여자의 관심을 끌 수 있었으며, 육체적 욕망도 자유롭게 해결하곤 했다. 하지만 노년이 되어 육체적으로 쇠약해지고 더 이상 남성성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그는 절망한다.    

  

그의 이름은 알 수 없다. 작가는 다른 이들의 이름은 정확하게 적지만 그는 끝까지 ‘그’로 남겨둔다.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보석상의 이름에서 따온 ‘에브리맨’이라는 제목, 그리고 끝까지 이름을 얻지 못한 ‘그’.    

  

"그는 척 클로스가 어떤 인터뷰에서 한 말을 기억나는 대로 들려주었다.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p.86)      


척 클로스는 척추장애를 극복한 포토리얼리즘의 창시자로 소개되는 사람이다. ‘아마추어가 영감을 기다릴 때 프로는 작업한다’는 일상의 엄정함에 대한 인터뷰를 남긴 그는 평생을 보통 사람의 얼굴을 그리는 작업에 매달려왔다고 한다. 평범한 사람들을 상대로 운영했던 아버지의 보석상과, 특정한 이름을 얻지 못한 ‘그’와, 보통 사람의 얼굴만을 그렸던 척 클로스의 작업들. 이 이야기가 누구를 향해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 짐작이, ‘그’가 바로 ‘나’라는 섬뜩한 자각이, 이 작품의 내면을 응시하게 하는 힘이 된다. 이름이 제시되지 않는 주인공 ‘그’, 에브리맨 즉 보통 사람이기에 누구나 그와 같이 늙고 죽어가는 삶을 벗어날 수 없기에, 그는 특별한 이름을 가진 누군가가 아니라 그냥 ‘그’인 것이다.    

  

"한때 나였던 남자! 나를 둘러쌌던 생활! 나의 것이었던 힘! 그때는 어디에서도 ‘이질감’은 느낄 수 없었다! 한때는 나도 완전한 인간이었는데." (p.135)      


 젊은 시절의 그는 신체적 완벽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죽음을 피하는 것이 삶의 중심이 되고 육체의 쇠락이 이야기의 전부가 된 자신의 노년은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어 괴롭다.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강렬한 일이 죽음이고 죽음은 정말 부당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래서 젊은 여자에게 수작을 걸며 육체적 욕구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현실은 그의 욕구를 조소한다.   

   

 2018년 문학동네에서 발간한 필립 로스의 자서전 『사실들』의 표지에는 1968년 뉴욕에서 집필 중인 그의 사진이 실려 있다. 로스의 나이 30대 중반의 사진이다. 그리고 이 책의 날개에는 ‘2018년 5월 22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라는 그의 마지막 이력이 스티커로 덧붙여져 있다. 한때 젊었던 작가는 늙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에브리맨의 주인공  ‘그’처럼.     

『사실들』,  문학동네, 2018




필립 로스는 '많은 독자들이 고백으로 위장한 소설을 소설로 위장한 고백으로 받아들이고 심판한다'며 씁쓸해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에브리맨의 ‘그’는 필립 로스 자신일 수도 아니면 나, 혹은 당신일 수도 있을 것이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 (p.162)     


노년이 다가온다. 내게도 또 당신에게도. 어느 순간부터는 어떻게 살 것인가 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질 것이다. 다만 몸도 마음도 덜 다치며 덜 쓸쓸하게 늙어가길 기대할 뿐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 속 '그'의 노년을 보며, 노년에 이르기 전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한다. ‘서로 베풀기도 하고 받을 수도 있는 친밀한 동반자에 굶주’리지 않도록, 지금 이 수많은 평범한 순간들의 행복을 꾹꾹 내 안에 갈무리하며 키워나가야겠다고…. 아마도 다른 ‘에브리맨’처럼 마지막 순간 나 역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두려움 속으로 빨려 들어가겠지만….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처음부터 두려워하던 바로 그대로." (p.188)


* 필립 로스는 미국 현대문학 4대 작가로 불렸고(코맥 매카시, 토머스 핀천, 돈 드릴로와 함께), 미국 작가 중 문학상을 가장 많이 받은 작가로 알려졌지만, 2010년 돌연 절필 선언을 한다. 에브리맨의 ‘그’가 그림에 의미를 잃고 노년을 힘겹게 버틴 것처럼 어쩌면 작가 자신도 다른 많은 ‘에브리맨’처럼 그렇게 노년의 쓸쓸함을 이겨내기 힘들었던 것은 아닐까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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