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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소록 Sep 26. 2024

하늘에는 티밥 같은 별이 떴다

기형도 詩集 『입 속의 검은 잎』

교탁 위에 교재를 내려놓은 후 그는 시집을 펼쳐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창을 뚫고 잘 익은 볕이 건너오는 한낮.

길고 우울한 시 한 편을 모두 읽어낼 동안 강의실 안은 투명하게 고요했다.


하늘에는 벌써 티밥 같은 별들이 떴다, 라는 시구를 한 번 더 읽고 나서 그는 우리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별을 보며 튀밥을 생각해 본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미루나무가 바람에 부푸는 모습을 보며 빵을 생각하고, 밤하늘의 별을 보며 튀밥을 생각하는 이의 가난에 대해 , 그 가난을 읊은 시인의 죽음에 대해 말했다.


그날 서점에 오래 서서 시인의 시를 눌러 읽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공중에 흩어졌다, 라고 쓴 시작(詩作) 메모를 보며 종로의 한 극장에서 죽음을 맞았다는 시인의 마지막 밤을 떠올렸다.


모든 시를 다 읽을 동안 시인의 마지막 밤이 따라왔다.

  




기형도 시인의 『입 속의 검은 잎』은 그렇게 내게 왔다.


교수님이 읽어주신 긴 시의 제목은 <위험한 家系·1969> 였다.


선생님, 가정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  방과 후 긴 방죽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몇 번이나 책가방 속의 월말고사 상장을 생각했다.  …                                  
나는 그날,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p83)


아버지는 풍병(風病)에 걸려 쓰러졌고, 누이는 야근 수당을 받으며 공장에 다녀도 츄리닝 윗도리 하나 살 여유가 없다. 학급의 반장인 나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난 잠바를 입은 채, 월말고사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다.


달걀 노른자처럼 노랗게 곪은 달(p81)
티밥 같은 별들(p82)
미루나무가 거대한 빵처럼 부풀어오르는 게 보였다.(p83)


가난에 짓눌린 '나'의 허기는 달도, 별도, 미루나무도 모두 음식으로 치환한다.  



그 해 겨울은 눈이 많이 내렸다. 아버지, 여전히 말씀도 못 하시고 굳은 혀. 어느 만큼 눈이 녹아야 흐르실는지. 털실뭉치를 감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신다. 언제가 봄이에요. 우리가 모두 낫는 날이 봄이에요? 그러나 썰매를 타다보면 빙판 밑으로는 푸른 물이 흐르는 게 보였다. 얼음장 위에서도 종이가 다 탈 때까지 네모반듯한 불들은 꺼지지 않았다.(p84)


그럼에도 이 가난한 가족은 끝내 봄을 기다린다.



*시 본문의 띄어쓰기나 맞춤법은 원문 그대로 수정하지 않고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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