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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Apr 14. 2021

토종 한국 엄마와 영국에서 자란 아이가 논쟁을 벌이면

"선생님이 그런 말 한적 없는데요."


등교 시간을 앞두고 아들과 나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불우어린이돕기 행사인 '퍼시 곰의 날 (Pudsey Bear Day)'을 맞이하여 학생들은 교복 대신 퍼시 캐릭터 색깔이 들어간 옷을 입어야 했다. 아들에게 이런 사실을 전달했더니, 선생님이 그런 말 한적 없노라 우겼다.


"선생님이 오늘 퍼시 곰의 날이라고 했어. 교복 대신, 퍼시 곰 색깔이 들어간 옷을 입어야 한데."

"선생님이 그런 말 한적 없는데요."

"어제 엄마가 선생님한테 들었거든."

"나는 들은 적 없는데요."

"학교에 모인 엄마 아빠들한테 다 말했다니까."


아들이 다섯 살 때다. 


집에서 늘 한국어로만 대화 나누고, 영어 공부는 동화책과 TV 방송으로만 하던 아들이 처음으로 영국의 교육 기관에 다니기 시작한 무렵이다. 아들이 학교에서 잘 적응할까 걱정되긴 했지만, 정작 이 꼬마 아이는 행복한 유년기를 보내고 있었다. 학교에서 말이 안 통하면 무조건 '헬프'라고 외치면 다 해결된 모양이다. 노련한 교사들의 대처 덕택인지 아들의 느긋한 태도 때문인지, 부족한 영어 실력에도 학교생활에 잘 적응했다. 


그런 아들이 '선생님이 그런 말 한적 없는데요.'라고 우긴 것이다. 


아들의 고집대로 평소처럼 교복을 입고 나가면 될 것 아닌가,라고 하겠지만... 솔직히, 아들보다 엄마인 내가 더 창피해질까 두려웠다. 영국의 수많은 학교가 이날 동시에 행사에 참가하는데 내 아들만 교복을 입고 나가면? 학교에서는 둘째 치고, 당장 거리에서 내 체면이 말이 되냐고. 


우리 집을 기준으로 얼추 동서남북 근거리에 4개의 초등학교가 골고루 위치해 있었다. 집을 나서기만 하면 등교를 하는 학생과 학부모를 사방에서 매일 비슷한 시각에 보곤 했다. 이날 이들과 마주치면 부모인 내가 이 중요한 행사를 잊은 것으로 오해하지 않겠는가. 


언제든 울음을 터뜨릴 듯 불만 가득한 표정의 아들을 겨우 설득해 점박이 무늬가 들어간 옷을 입게 했다. 그러고 집을 나섰더니... 하하하, 저거 보라고, 길을 건너기도 전에 벌써 알록달록한 색깔이 곳곳에서 눈에 들어왔다.


"저기 봐. 애들이 전부 교복 말고 다른 옷 입었지!"


입을 크게 벌린 채 곁에서 아무 말 못 하고 주변만 바라보는 꼬마가 있었다.



redbubble.com..................Manor Infants Longbridge                                   




어린 시절의 아들과 나는 논쟁을 자주 벌였다.


이제 겨우 의사표현을 하나 싶을 정도로 아들이 어리고 한국어와 영어가 모두 서툴러도, 나는 아들의 말과 의견을 최대한 들어주었다. 그리고 문제가 있다 싶을 때 이를 지적하고 대화로 해결하려 했다. 아들이 고등학생 나이가 된 지금도 둘 사이에 논쟁은 벌어지지만, 어린 시절에는 엉뚱한 곳에서 충돌이 발생했다.


한국에서만 익혔던 엄마의 영어 실력을 아들은 늘 못 미더워했다. 영어도 전공하고 영국에서 직장을 다닌 엄마요, 이제는 집에서 번역일을 하는 엄마다. 다른 어른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도 나눈다. 그럼에도 주변에서 늘 보는 원어민보다 영어를 못하는 엄마가 아들에게는 그저 어설프게만 보인게지.


아들은, 부모의 영어 발음이 학교나 TV에서 듣던 것과 다르다 싶으면 곧바로 지적했다. 해외에서 자녀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들 비슷한 경험을 한다. 


한 여성은, 아이의 학교에서 다른 학부모와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이 광경을 목격한 딸이 황급히 자신에게 뛰어 왔던 경험을 들려줬다. 영어가 어설픈 엄마를 위해 아이가 자주 통역을 해주다 보니, 통역도 없이 다른 사람과 대화에 나서는 엄마를 막아서기 위해서다.


엄마의 대화를 막는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 집 또한 이래저래 엄마의 지적 수준과 전문성을 아들로부터 의심받아 왔다. 이런 아들과 의견 차이가 생기면 둘의 대화는 논쟁으로 번질 수밖에 없다. 그런 논쟁 중 특히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이 자리에 소개해봤다. '너 그때 그렇게 고집 피운 일 기억나니?' 라며 지금껏 아들에게 우려먹고 있는 논쟁이다.



"내 친구는 JHON 맞아요."


아들이 아홉 살 때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무렵이다. 우리 가족은 아들의 반 친구 전원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돌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들이 예전에 다니던 학교에서는 학생의 명단을 나눠줬지만, 이번 학교에서는 그런 자료를 줄 수 없다고 나왔다. 어쩔 수 없이 아들과 머리를 맞대고 26명의 급우들 이름을 하나씩 떠올렸다. 


Theo

Wiktoria

John

Amelia

Bertie

Charlotte

Henry

Natasha

Jacob

Sasha

......


잦은 이사 때문에 아들은 두 번이나 학교를 옮겼다. 두 번째 초등학교까지는, 아들의 급우 이름을 다 외웠으니, 엄마는 능력자라고 아들에게 지금껏 자랑한다. 이날도 26명 전원을 거의 오롯이 나 혼자 힘으로 기억해 내고는 한껏 뿌듯해하고 있는데, 아들이 문제를 지적했다. 


"엄마요... 존 이름은 JOHN이 아니라 JHON인데요."

"뭐? 존의 철자가 어떻게 JHON이 되냐?"

"내 친구는 JHON 맞아요. 걔 이름이 적힌 걸 내가 봤어요."

"엄마가 영국 사람 중 JOHN 하고 JON은 봤어도, 지금껏 JHON은 본 적 없거든."

"내 친구 이름은 달라요."


오로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친구 JHON인가 보다. 자기가 봤다고 우기는 아들 앞에서 뭐라 받아칠 말이 없었다.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아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지만, 틀린 철자 그대로 카드에 적어 보낼 수도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아들과 제일 친한 친구의 이름이다. 존의 부모에게 물어봐도 되지만 이런 걸 확인시켜 달라고 하기에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답을 뻔히 알면서도 담임 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선생님에게서 온 이메일 답장을 아들에게 보여줬다.


아들아, 아직 JHON이란 영국식 이름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단다.



"엄마요, 이게 뭔지 알아요?"


아들이 대여섯 살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교에서 새 단어를 배우고 오면 아들은 그날 배운 단어를 그림으로 보여주며 엄마의 영어 실력을 테스트했다. 그 모든 테스트를 매번 무사히 통과했지만, 딱 두 문제 틀리는 바람에 내 영어 실력이 평가절하된 사건으로, 나로서는 상당히 억울하다.  



아들이 보여준 그림 (동일한 그림은 아니고 대충 이렇게 생김)

line.17qq.com


"엄마요, 이게 뭔지 알아요?"

"어... 이거... 잠자리채인가? 뭐지? 모르겠다."

"윈드속이에요."

"윈드... 뭐???"


* Windsock = 바람자루


이날까지만 해도 나는 이 물체의 존재를 몰랐고, 당연히 한국어와 영어, 그 어떤 단어로도 알리가 없다. 유치원생에게 철자를 물어봐야 했다.



아들이 보여준 그림 2

SVG Clipart


"엄마요, 이게 뭔지 알아요?"

"이거... 어... 술병인가?"

"바~즈에요."

"바즈?"


아들이 내민 종이에는 실물 사진이 아닌 단순한 그림이 담겨 있었다. 술병일 거라는 내 예측이 황당할 수도 있지만 꽃병은 더욱 의외였다. 어쨌건, 꽃병을 뜻하는 영어 단어 Vase는 영국에서 '베이스'가 아닌 '바즈'라고 발음하는데 당시만 해도 나는 몰랐다. 


"아무리 영국식 발음이 미국식과 다르다 해도 그렇지, 어떻게 Vase를 바즈라고 발음할 수 있냐?"


나는 흥분해서 곧바로 사전을 뒤졌다.

vase [vɑː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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