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렇겠지만 때때로 참기 힘든 짜증이 몰려올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때는 내가 느끼는 진짜 감정의 이름을 찾기 어려워 그냥 ‘짜증’이 난다고 밖에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전에 어느 프로그램에서 김영하 작가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글을 쓸 때 ‘짜증 난다’라는 표현을 쓰는 걸 금지시켰다고 했다. 짜증이라는 단어가 사람의 다양한 감정을 너무나 손쉽고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건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기분이 안 좋을 때 누군가 옆에서 왜 그러냐고 물으면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고 “너무 짜증 나!”라고 아주 손쉽게 대답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역시 짜증 난다는 말을 정말 많이 한다. 심지어 혼자 있다가도 “아우 짜증 나!”라며 분노를 터뜨리는데, 입 밖으로 내뱉는 소리는 짜증 난다는 말 하나지만 사실 그 짜증의 이유는 아주 다양하다. 더울 때, 추울 때, 졸릴 때, 출근하기 싫을 때, 접시를 떨어뜨려서 깨졌을 때, 할 일을 깜빡했을 때 등등...
덥고 추운 걸 컨트롤할 수 없는데서 오는 ‘무력감’과 깜빡 잊은 것이나 실수한 것에 대한 ‘자책’을 모두 짜증 난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간단한지. 그래도 이런 경우는 짜증뒤에 숨은 진짜 감정의 이름을 알 수 있는 경우지만, 정말 답답한 때는 실제 내 감정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상황과 맞닥뜨릴 때다.
나는 대한민국의 K장녀 유교걸로 태어났다. 우리 삼 남매 중 첫째였기도 했고, 사촌들 중에서도 장녀였다. (자주 만나지 못하는 고종사촌과 외가 식구들의 제외하고) 그래서 나는 살아오면서 처음 겪는 일이나 인생에 어떤 조언이 필요할 때 질문을 할 수 있는 언니나 선배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대학을 들어가면, 혹은 취업을 하게 되면 멋진 사수나 선배들의 피와 살이 되는 조언을 듣고 배우며 멋진 여성으로 자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누구나 한 명쯤 동경하는 선배가 있다는데, 내게는 왜 아직 나타나지 않는 건지 의문이었고, 오랜 기다림 끝에 내가 믿고 따를만한 인생선배가 드디어 나타났나 싶으면 어김없이 그 사람의 치명적인 단점이 드러나 크게 실망하곤 했다.
그래도 그 치명적인 단점이 비교적 빨리 드러나 금방 마음을 접으면 괜찮은데, 나름 오랜 시간을 의지하고 믿었던 사람에게서 이제껏 몰랐던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실망감을 넘어 배신감에 가까운 감정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지금의 내게 있고, 그에게 그런 감정이 느껴진 것은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나는 아직 남아있는 일말의 애정과 급격하게 늘어나는 불쾌감 사이에서 그 사람과 관계를 아슬하게 유지해오고 있다.
그 사람에게 발견한 치명적인 단점 중 하나가 바로 자기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이름을 알지 못해 주변 사람에게 짜증을 낸다는 것이다. 이유도 없이 마주하는 폭풍 같은 짜증 앞에서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고, 그의 마음이 진정된 후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것은 주로 자신이 한 실수에 대한 자책이거나, 자신이 계획한 데로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생기는 좌절감이거나,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는데서 오는 열등감이었다. 그리고 나는 종종 그 사람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나도 내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밑도 끝도 없이 화를 내며 어쩌면 주변사람들을 괴롭게 만들진 않았나 하는 생각이 번뜩 들자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 몰려와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그때부터 나는 내 감정의 이름을 알아내는 연습을 시작했던 것 같다.
일기를 쓰는 일은 내 진짜 감정을 찾는 것에 큰 도움이 된다. 말 그대로 종일 짜증이 가득 찼던 날,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공책을 꺼내 마구마구 오늘 있었던 일들을 휘갈겨 쓰다 보면 마음이 좀 진정되기도 하고, 동시에 사건(?)의 순서와 맥락을 한번 더 짚어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내가 짜증이 났던 순간이 정확이 어떤 지점이었는지 파악이 되고, 그때 느낀 감정의 이름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타인에게 느낀 감정이었는지, 그저 나 자신에게서 느끼는 감정이었는지도.
꼭 하루를 마무리하며 손으로 쓰는 일기의 형식이 아니더라도 나만의 공간에 나만의 방법으로 기록을 남기는 것은 참 좋은 습관인 것 같다. 내가 처음 시작했던 ‘습관성 기록’은 블로그에 주간일기를 올리는 것이었다. 예전부터 이것저것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서 내 핸드폰에는 쓸데없이 사진이 참 많았다. 그러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핸드폰 용량 확보를 위해 하나둘 지워나갔는데 새삼 내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을 담은 사진들을 지우는 게 아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지우기 전에 블로그에 일주일 단위로 사진과 짧은 설명을 적어 남기기 시작했는데, 그게 주간일기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주간 일기의 마지막에는 일주일을 보낸 소감 같은 감상을 몇 줄 남기는데, 그 몇 줄의 반성과 다짐들을 남기는 시간이 내가 나를 알아가는데 은근히 도움이 되고 있다.
내 인생선배로 삼을 뻔한 그 사람과는 계속 애증의 감정을 품은 채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다만, ‘애’는 많이 없어지고 ‘증’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 괴로운 부분이다. 여전히 과거에 품었던 고마운 마음의 파편들이 아직 남아있어 그것들을 들여다보며 마음을 다스리곤 하지만, 예전에 느꼈던 닮고 싶고, 좋아하던 모습은 이제 모두 실망감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지금은 그 실망스러운 모습들을 통해 ‘나는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하는 다짐들을 하며 아이러니하게도 인생의 조언을 얻고 있기도 하다. 이런 마음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과연 나에게나 그에게나 좋은 방향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다만 예전보다 조금이나마 어른스러워진 내가, 그리고 앞으로 조금이나마 더 어른스러워질 내가 그에게서 느끼는 감정들의 이름을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면, 지금보다는 더 성숙한 관계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갖고 있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좀 더 성숙한 이별을 기대하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