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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선한’ 사람이 많은 세상은 왜 이 모양일까

영화 〈콘티넨탈 '25〉

by re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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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솔리아는 주변인에게 계속 죄책감을 토로한다. 그녀가 빈 건물의 지하 보일러실에 거주 중이던 노숙자 글라네타슈에게 퇴거 명령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그가 자살해버렸기 때문이다. 오르솔리아는 ‘선인’이 분명하다. 그녀는 글라네타슈를 당장 끄집어내지 않고 그에게 혼자서 짐을 정리할 시간을 줬다. 끔찍한 사건은 단지 사고로 운동을 그만둔 이후 삶이 망가진 글라네타슈가 그녀의 호의를 ‘이용’한 것일 뿐이다.


오르솔리아에게는 법적 책임이 없다. 오르솔리아는 매뉴얼을 완벽히 지켰고, 집행 과정에서 인권 침해가 발생하지 않음을 증명할 수 있도록 현장을 촬영하기도 했다. 여러 책임 있는 사람이 그녀에게 이를 확인해준다. 그러나 학교에서 법학을 가르쳤고, 헝가리의 독재자 오르반에게 매우 비판적이며, 인문 교양서를 읽고 고전영화를 보는 그녀에게 이 일은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남긴다. 그래서 남편에게 양해를 구하고 가족 여행에서 혼자 빠진다. NGO에 기부하는 것으로 어쩔 수 없는 죄책감을 달랜다는 친구에게 토로하고 자신 역시 기부를 이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위로받으러 간 어머니가 헝가리로 돌아가라고 재촉하자 독재자가 있는 곳으로는 갈 수 없다고 일갈한다. 배달 일을 하는 제자와 오랜만에 만나서는 술을 마시며 또 한 번 괴로움을 털어놓는다. 신부에게도 그렇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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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르솔리아가 온갖 군데에 죄책감을 털어놓으며 괴로워하는 사이, 글라네타슈가 있던 곳에는 콘티넨탈 호텔 건축이 시작되고 어느새 완공 단계에 이른다. 도시의 다른 곳에서도 규모 있는 재건축이 진행 중이다. 우습게도, 오르솔리아의 죄책감은 글라네타슈를 제대로 추모하거나 애도하지도, 그를 죽음으로 내몬 시스템을 멈춰 세우지도 못했다. 진보적 교양 시민의 ‘자기만족’을 드높여줬을 뿐이다. 오르솔리아가 자기 죄책감에서 ‘이익’을 챙기는 게 분명한 건, 그녀가 제자와 술을 마시다 섹스한 후 파트너로 지내기로 합의한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죄책감은 휘발되고, ‘진보적이고 깨어 있는 시민’의 이미지처럼 그녀를 이롭게 하는 것만 남는다.


오르솔리아의 죄책감은 관객에게는 무력감으로 변환된다. 이 폭력적인 사회에서 우리는 얼마나 안온하게 자조하며(자기만족하며) 세상이 망해가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것일까. 글라네타슈가 죽고, 오르솔리아가 괴로워하는 동안 얼굴 한 번 나오지 않는 콘티넨탈 호텔의 건축주만이 웃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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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티넨탈 '25〉는 7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을 받았고 26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 이 영화가 71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받은 같은 감독의 〈배드 럭 뱅잉〉을 만든 라두 주데 감독의 영화라는 건 뒤늦게 알았다. 〈배드 럭 뱅잉〉를 보며 루마니아의 온갖 부조리를 무차별적으로 폭로하는 감독의 솜씨가 굉장히 익살맞다고 느꼈는데, 〈콘티넨탈 '25〉는 감독의 영화적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보다 묵직하고 날카롭다. 영화를 본 후 나오는 우리의 깊은 한숨은 과연 오르솔리아의 죄책감과 다를 수 있을까. 이토록 ‘선한’ 사람이 많은 세상은 왜 늘 이 모양일까를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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