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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각자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묻는 다큐들 1

제17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by re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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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A Couple

‘기획전 1. 프레더릭 와이즈먼 전작 순회 회고전’ 상영작

프랑스, 미국/2022/64min/DCP/Color/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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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악처’ 소피아의 격정 토로


최근에 감명 깊게 읽은 애나 펀더의 책 《조지 오웰 뒤에서》와 공명해, 이 영화의 메시지가 무척 강렬하게 다가왔다. 세계적 대문호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의 일기와 편지를 토대로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배우는 브루타뉴 해안의 섬 벨일앙메르의 평화로운 자연 경관을 배경으로 소피아의 심경을 내내 격정적인 독백으로 대변한다. 흔히 소피아는 톨스토이의 ‘악처’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녀가 남긴 기록은 다른 말을 한다. 소피아는 톨스토이의 아내인 동시에 하녀, 조교, 뮤즈, 연인 역할을 동시에 해내야 했고, 무엇 하나 어긋날 때마다 수시로 면박을 들어야 했다. 소톨스토이는 소피아가 지루하다고 끝없이 불평했으며, 감정적으로 엄청나게 변덕스레 굴었다. 소피아가 아무리 가족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톨스토이의 일을 ‘보조’해도 그는 만족하지 않았고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겨 소피아를 괴롭게 했다. 소피아도 처음엔 자신을 탓했다. 톨스토이의 눈으로 자신을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각성한다. 소피아는 중국 속담을 인용한다. “누군가 편히 살면, 누군가는 굶어 죽는다.” 여기서 편히 사는 건 톨스토이, 영혼이 굶어 죽는 건 소피아다. 그럼에도 소피아는 톨스토이를 사랑해서 치욕스럽고, 역사에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기록되지를 알 것만 같아서 한없이 괴롭다. ‘거장’과 가부장제에 기반해 체계적으로 지워진 그들의 ‘조력자’ 아내의 관계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탐구되어야 할 주제다.




바위를 부수고/Cutting Through Rocks

‘국제경쟁’ 섹션 상영작

미국, 이란, 독일, 네덜란드, 카타르, 칠레, 캐나다 / 2025 / 93min / DCP / Color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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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마음대로 하고 다니니 여성일 수 없다’는 기묘한 낙인


처음엔 자유주의적 계몽 영화인 줄 알았다(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이를 초과하는 지점이 있다. 영화는 이란 시골 마을에서 여성 최초로 의회 의원이 된 사라 샤흐베르디를 비춘다. 먼저, 사라는 존재 자체로 메시지가 되는 인물이다. 그녀는 오토바이와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그녀가 소녀들에게 오토바이 타는 법을 가르치면서도 남성들의 보복을 우려해 두건을 쓰라고 알려주듯, 이는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이동’하려는 여자는 늘 사회적 제지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한편 조산사로 일하며 수백 명의 아이를 받아낸 사라는 이혼 경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시골에서 당선되기엔 여러모로 ‘불리한’ 조건이다.


그러나 그녀는 당당히 당선된다. 그녀가 약속한 변화가 청년과 여성 유권자에게 설렘을 주었기 때문이다. 사라는 조혼 방지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친다. 조혼으로 소녀들이 평생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는 데 반대하기 때문이다. 교육에도 힘쓴다. 자신처럼 아이들이 자기 안의 가능성을 마주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마을에 가스관을 설치해 현대화하며 집문서를 부부 공동 명의로 바꾸는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고, 마을에 공원을 만드는 작업에도 열심이다. 사라는 한 명의 정치인이 모든 걸 바꿀 순 없지만, 한 명의 정치인이 어디까지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지는 보여주는 좋은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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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가부장적 사회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사라의 남동생을 포함한 마을의 남성 공동체가 그녀의 권위에 도전한다. 여기까지는 ‘익숙’하다. 정말 충격적이었던 건 법원의 개입이다. 법원은 사라의 복장, 이혼 경력, 독신 상태를 근거로 그녀의 성별 정체성을 의심한다. 판사는 묻는다. 왜 남자처럼 옷을 입고 다니는지, 왜 여성들이 자꾸 당신네 집에 모이는지 등등. 판사는 그녀를 의사에게 보내 성별 정체성을 진단받으라고 명령하기도 한다. 이 사회에서 여성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데, 너는 마음대로 하고 다니니 ‘여성’일 수 없다는 거다.


여성의 신체와 정신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성별 정정의 문제를 꺼내든 것은 충격적이다. 보통 성별 정정은 트랜스젠더가 지정받은 성별에 불편함을 느껴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는 차원에서 다뤄지는데, 이 영화는 이 이슈가 가부장제의 신체 통제 방식의 일환일 수 있음을 어느 여성 정치인의 서사를 빌려 펼쳐낸다. 물론 이것이 이란의 ‘후진성’을 증명하는 근거로 활용될 수는 없다. 신체에 대한 통제로 누군가를 위축시키는 일은 오랫동안 전 세계에서 발생해온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별 정정이 이런 맥락에서 악용될 수도 있다는 것은 퀴어/트랜스의 관점에서 면밀히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사라에게 최종적으로 성별 정정이 내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안도’하기에는 이 문제의 폭력성이 심대하기 때문이다. 〈봉인된 땅〉(1977), 〈신성한 나무의 씨앗〉(2025) 등 이란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는 언제나 첨예한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에서 나오는 힘이 이란 사회를 변화시키는 동력이 되었으면 좋겠다.




반칙왕 몽키/The Rule Breaker

‘한국경쟁’ 세선 상영작

한국/2025/102min/DCP/Co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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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전업주부이자 돌봄/양육/마을/공동체 활동가인 몽키의 이야기


이 영화는 아이 네 명을 둔 전업주부 아빠의 이야기다. 그러나 동시에 돌봄/양육/마을/공동체 활동가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쪽 팔에 막내 아이를 안고 다른 손으로는 핸드폰을 들고 쇼츠를 찍으며 보드를 타는 몽키는 ‘전업주부 남성’이라는 희귀한(?) 정체성을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오히려 이 안에서 자기다움과 삶의 만족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 행복을 가족을 넘어 마을 공동체와 함께 나눈다. 든든한 파트너인 안나와는 종종 아이들의 미래를 두고 심각한 대화를 나누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밝고 경쾌한 리듬으로 행복하게 자라는 아이들과 그들의 주돌봄자 아빠의 모습을 담아내는 영화다. 남성 돌봄자의 역할과 의미를 폭넓게 풀어내는 굉장히 뜻깊은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나는 마을 방과후 교사입니다〉를 연출한 두 감독의 두 번째로 협업한 영화라는 건 영화를 보고 나서야 알았다. 돌봄과 교육에 관한 두 감독의 진심 어린 관심이 몽키라는 ‘문제적’ 인물을 영화로 담아내는 동기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몽키의 돌봄/양육/마을/공동체 실험이 꺾이지 않기를, 몽키의 가족이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연스레 샘솟는다. 그러려면 몽키와 같은 삶이 더는 ‘반칙’으로 여기지 않는 변화가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몽키네 가족만의 일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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