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
‘한국경쟁’ 세션 상영작
한국/2025/74min/DCP/Color/12
▶다시 한번, 느리고 약한 존재의 강렬함을 포착하다
감독의 전작 〈씨앗의 시간〉에 이어 이 영화에도 등이 잔뜩 굽은 노인이 나온다. 이들은 더 이상은 굽을 수 없을 것 같은 허리로 씨앗을 뿌리고, 밭일을 한다. 느리지만 정갈한 이들의 몸짓에 감독이 왜 자꾸 주목하는지는 영화를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그 신체에 깃든 시간과 이야기가 기묘한 강렬함을 뿜어내기 때문이다. 이들이 사라질 위기(토종 씨앗)에 있거나 사라지는 중(노인의 죽음)이라는 점에서 영화의 기록과 관찰은 더한층 귀해진다.
오세봉 할머니에게 ‘상치(상추)’ 씨앗을 받아 서울과 시골을 오가며, 감독은 할머니 마당 바깥에서 안방으로 조금씩 거리를 좁혀간다. 할머니는 감독을 ‘씨앗댁’이라 부르며 어머니가 내려주었으나 이제 더는 명맥을 잇기가 어려워 보이는 상치 양육 노하우를 일러준다. 할머니가 돌보고 가꾸는 건 토종 씨앗만은 아니다. 새끼를 낳은 고양이를 돌보는 할머니의 현재는 전쟁통에 동포를 먹이고 수십 년간 마을 사람들에게 베푼 넉넉한 돌봄의 과거와 포개진다. 오세봉 할머니와 그녀의 일상을 담아내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음식, 나눔의 가치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곱씹게 만든다.
할머니는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때가 참 좋은 때”였다고 말한다. 나눔과 돌봄, 베풂이 이전만큼은 어려워진 시절, 기력을 소진해 자기가 평행 해오던 것을 더는 마음대로 하기 어려워진 지금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한편, 영화는 감독이 느끼는 몸의 통증과 악기 연주에 대한 대화를 할머니 이야기와 병치하는데, 이는 미세하고 섬세한 리듬이 필요한 일과 할머니의 일상적 리듬이 비슷한 구조를 취하고 있음을 보인다. 이 영화를 보며, 느리고 약하지만 그래서 강한 것들이 뿜어내는 강렬한 힘을 카메라로 포착하고 담아내는 감독의 태도와 솜씨에 다시 한번 깊은 신뢰를 느꼈다.
'한국경쟁' 상영작
한국/2025/83min/DCP/Color/12
▶소수자성과 그로 인한 비극에 함몰되지 않는 놀라운 이야기
이제 마흔이 넘은 선영은 청소년기에 사고로 중증 지체 장애를 얻었다. 가족은 그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집을 팔고 이사했다. 이후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쓰러져 요양원에 있고, 어머니의 건강도 점차 악화되었다. 형은 군대에서의 일로 정신질환을 얻었다. 기초수급자로 사는 선영은 가족의 생활을 위해 9년 정도 법원행정고시와 로스쿨 입시를 준비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그전에는 삶의 무게에 눌려 10여 년간 게임만 하며 시간을 보냈다. 도대체 이 모든 일을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있기는 한 걸까? 나는 감히 선영이 삶에 느끼는 무게를 ‘안다’거나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묘한 것은 이 영화가 우울하지도, 숨도 못 쉬게 불행과 불운을 몰아붙이듯 전시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영화의 분위기는 반대다. 심지어 경쾌한 느낌이다. 선영은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보겠다는 감독 친구에게 ‘내 삶이 이미 무거우니까 영화가 재밌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감독은 비관에 함몰되지도, 섣불리 낙관을 전망하지도 않으며 이 미묘한 경계 위에서 선영이 질주하게끔 연출해 그의 뜻에 성공적으로 부응한다. 선영은 전동 휠체어를 탄다. 하지만 그렇기에 장애를 가진 몸으로도 달릴 수 있다. 이 역설적이면서도 생산적인 긴장은 선영의 삶에서 근본적인 조건을 이루는 듯 보이는데, 이는 그가 남들과는 전혀 다른 삶의 지평 위에서 자신만의 삶 전망을 벼려내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 구체적 내용을 면밀히 가늠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이 점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압도적으로 불리한 처지를 분명히 인지하면서도 어느 한쪽에 잠식당하지 않고 낙관과 비관의 비율을 적당히 유지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선영의 이야기와 삶의 태도가 갖는 은은한 힘의 비밀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영화가 선영이 이미 그 상태에 도달한 이후에 촬영되어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어떤 시간을 보내 지금에 다다랐는지에 관한 이야기 역시 대단히 근사할 것만 같다. 9년간 삶을 즐기며 ‘널널하게’ 시험 준비를 하면서도 가족의 물질적 안녕을 위한 토대를 살뜰히 다지는 그의 생활력과 결단은 정말이지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지점이 있다. 나는 앞으로 소수자성과 그로 인한 비극에 함몰되지 않는 이야기에 관한 가장 근사한 참조점으로 이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국제경쟁’ 세선 상영작
쿠바, 스페인/2025/75min/DCP/B&W/12
▶악어를 사냥하는 어느 가난한 쿠바 남성의 삶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
온몸이 잔근육으로 가득한 왜소한 남자가 밧줄에 묶은 악어를 등에 지고 쿠바의 습지대 자파타를 걷는다. 롱테이크로 한참 동안 이어지는 이 흑백 장면은 도대체 이 남자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물음을 정말이지 강렬하게 촉발한다. 남자의 이름은 랜디. 뒤이어 그가 습지대에서 최소한의 물품만 갖추고 생활하는 모습이 이어진다. 한편 낡은 라디오에서는 쿠바 공산당이 혁명 이념과 팬데믹 대응 방안을 홍보하고 있다. 랜디의 생활과 라디오 방송의 근사한 내용 사이에는 커다란 괴리가 있다.
오프닝만큼이나 강렬한 롱테이크 장면이 또 한 번 이어진다. 이번에는 랜디가 악어를 사냥하는 장면이다. 밧줄과 나무막대로 악어를 사냥하는 장면 내내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다. 랜디가 실패한다면? 물 안에 또 다른 악어가 있다면? 혼자 영화를 촬영했다는 감독에게 악어가 다가온다면? 이 모든 물음 끝에 랜디는 또 한 번 악어 사냥에 성공한다. 악어의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분리한 그는 옷을 갈아입고 자전거를 타고 마을로 향한다. 아내 메르세데스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아들 데이니스가 있는 마을로.
영화의 중반부부터는 아들을 돌보는 어머니의 돌봄 노동과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아버지와의 재회 등 어느 가난한 가족의 단란한 한때가 나온다. 그러나 랜디는 다시 자파타로 가야만 한다. 악어를 사냥하는 건 불법이지만 어쩔 수 없다. 팬데믹으로 고립된 시골 마을, 당의 선전과 달리 열악하기만 한 마을에서 생계를 이어가려면 말이다. 팬데믹과 경제적 절망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에 관해, 생존을 향한 한 가난한 가족의 처절한 분투와 고립을 다루는 이 영화만큼 강렬하게 보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기획전 2. 인간, AI, 그들의 영화 그리고 그들의 미래’ 세션 상영작
미국/2025/98min/DCP/Color/B&W/15
▶흑인 퀴어 유토피아로 향하는 예술의 여정
흑인 게이 남성이자 예술가인 라샤드 뉴섬은 흑인 퀴어가 기쁨과 연대로 모이는 전시를 기획한다. 그에게 거대한 전시 공간이 주어지고, 라샤드는 여러 예술 장르를 망라하는 복합적인 전시로 공간을 꾸려나가기 시작한다(몇몇 공연 장면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보깅 댄스: 라샤드는 퀴어 하위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이 춤을 오픈 소스로 제시한다. 우크라이나, 브라질, 일본 등지의 보깅 댄서들이 보깅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함께 공연한다. 보깅이 80년대 미국 퀴어 하위문화의 해방을 상징하듯, 동시대 타국의 댄서들에게도 보깅은 움츠린 자아의 해방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의 해방이 보깅이라는 공통의 몸짓 위에 포개지는 것이다.
-AI: 라샤드는 탈식민주의 퀴어 이론을 AI에게 학습시킨다. AI의 이름은 비잉(Being). 라샤드는 비잉을 ‘My Child’라 부르고, 비잉은 라샤드를 ‘아버지’라 부른다. 라샤드는 비잉에게 아프리카 나무 조각에서 영감을 받은 외양을 선사하고, 보깅 댄서의 움직임 역시 학습시킨다. 비잉은 전시에 참여한 관객과 예술 워크숍에서 예술, 정치, 치유에 관해 토론한다. 흑인과 퀴어가 남긴 유무형의 유산에 AI가 접목되며 과거와 현재, 미래가 겹쳐진다.
-메시지: 무용수와 이론가, 전통 예술과 디지털 예술이 교차하는 이 대규모 전시에서 메시지를 총괄하는 건 라샤드다. 그러나 이 공연에 담긴 목소리는 그만의 것이 아니다. 여전히 일상에서 불안과 수치심을 겪는 트랜스, 성 학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가수 등 예술로 해방을 추구하는 흑인/퀴어 커뮤니티의 일원이라면 누구든 이 프로젝트에서 안정과 해방을 느낄 수 있다.
역사, 이론, 기술, 정체성, 정치가 예술로서 어우러지는 과정이 인상적인 영화다. 더불어 영화는 우리가 ‘익숙하다’고 여기는 메시지가 예술의 형식적 실험으로 어떻게 갱신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