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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게이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영화들

제15회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상영작 리뷰 2

by re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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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보이 위드 핑크 팬츠

The Boy with Pink Pants

Margherita Ferri/Italy/2024/2024/114min/Color/Drama/Italian/‘월드 프라이드’ 섹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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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색 바지를 입은, 지독할 정도로 사랑스러운 소년


예술적 재능이 있는 사랑스러운 소년 안드레아는 낙제해 유급된 같은 반 형 토디에게 묘한 끌림을 느낀다. 어린이 같은 자신과 달리 어른처럼 보이는 얼굴과 몸에 매혹과 위압감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다. 안드레아는 토디의 공부를 도와주며 조금씩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그러던 중 토디의 의심을 사는 두 사건이 연달아 발생한다. 첫째는 안드레아가 탈의실에서 토디를 끌어안고 그의 목에 가벼운 키스를 한 일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안드레아가 엄마가 사준 핑크색 바지를 입고 등교한 일이다. 이후 학교에 안드레아가 호모라는 소문이 돌고 집단적 사이버불링이 시작된다.


영화는 자살한 안드레아의 내레이션으로 전개된다. 실화에 바탕을 둔 이야기라 하는데, 안드레아의 어머니는 이후 퀴어 대상 사이버불링을 방지하는 운동에 힘썼다. 그리고 자기 아들에게 핑크색 바지를 사준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영화 속 안드레아는 정말 지독할 정도로 사랑스러운데, 이 영화가 핑크색 바지를 입고 싶은 소년과 그들의 부모에게 작은 위로로 다가갈 수 있다면 좋겠다. 2024 탈린블랙나이츠영화제 상영작.




퀴어파노라마

Queerpanorama

Jun Li/Hong Kong, USA/2025/87min/B&W/Drama/English, Mandarin/‘아시아 프라이드’ 섹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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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욕망을 받아내는 텅 빈 것으로서의 정체성


홍콩. 한 젊은 게이 남성이 데이팅 앱으로 사람들을 만나 섹스를 한다. 섹스 후에는 대화를 나눈다. 그는 첫 번째 남자에게 자신이 그저 그런 영화에 나오는 배우라고 소개한다. 두 번째 남자에게는 과학자, 세 번째 남자에게는 교사, 네 번째 남자에게는 노래방 도우미, 다섯째 남자에게는 배달 노동자라고 소개한다. 이런 과정이 계속 이어진다. 남자는 이전에 만난 남자의 직업과 이름을 자신의 것인 양 ‘위장’한다. 직전에 몸을 섞은 사람의 직업과 이름, 상태, 욕망, 감정 등은 다음 남자와의 만남에서 ‘내 것’이 된다. 이 남자의 정체성은 빈 그릇이다. 타인을 받아내는 빈 그릇. 남자는 끝도 없이 홍콩을 배회하며 남자를 만날 것이고, 그럴 때마다 그의 정체성과 욕망, 감정은 새로이 일렁일 것이다.


타인의 욕망을 받아내는 텅 빈 것으로서의 정체성. 안드레아 롱 추가 《피메일스》에서 정식화한 젠더 이론의 새로운 공식이다. 이 인상적인 영화를 보는 내내 롱 추의 책이 생각났다. 난국을 마주한 퀴어 이론이 새로운 돌파구를 찾은 느낌이다. 2025 베를린국제영화제 상영작.




사복경찰

Plainclothes

Carmen Emmi/USA/2025/95min/Color/Drama, Thrilleer/English/‘월드 프라이드’ 섹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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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를 ‘검거’하던 경찰, 내면의 지독한 혼란과 해방


게이를 ‘검거’하는 형사의 혼란을 담은 이 영화에는 선배가 있다. 1980년 작 〈광란자〉다. 〈광란자〉에서, 게이 클럽에 잠입해 게이를 검거하는 경찰이 혼란 끝에 이성애자의 세계로 ‘복귀’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아니다.


잘생긴 경찰 루카스의 주요 임무는 사람 많은 쇼핑센터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를 눈여겨본 게이들이 눈짓으로 조용히 추파를 던지면,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한적한 화장실로 향한다. 루카스를 따라온 상대가 상대가 바지를 벗는 걸 확인하는 순간, 루카스는 바로 밖으로 나와 대기 중인 형사에게 체포하란 신호를 보낸다. 나중에는 안쪽 창고에 숨어 증거를 모으기 위해 카메라로 촬영까지 한다. 1990년대 뉴욕, 게이들을 검거하는 경찰의 저열한 방식이다.


루카스의 혼란은 그 역시 남성에게 성적 끌림을 느낀 적이 있다는 데서 시작된다. 체포를 시도하려던 남성에게 끌려 그가 체포되지 않도록 도움을 준 루카스는 이후 그와 은밀한 만남을 이어가며 그간 억눌러온 욕망이 분출하듯 폭발하는 걸 느낀다. 같은 욕망을 가진 사람들을 검거하는 일에 죄책감도 느낀다. 자신이 구해준 남자에게 버림받은 후에는 몰래 그의 신원을 조회해 목사로 일하는 남자를 직접 찾아가기도 한다.


다른 한편, 루카스는 가족 내에서도 여자친구와 헤어진 후 결혼 압박을 받는 등 곤란한 상황에 놓이는데, 여기에 자기 대신 죽은 아버지가 게이로 오인받는 상황까지 겹쳐진다. 결국 루카스는 기존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그대로 둔 채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찰을 그만둔 후 자신과 아버지를 모욕하는 삼촌을 때려눕힌다. 이제 그는 자신이 검거당할 것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될 테지만, 모든 짐을 벗어 던진 그의 표정은 어딘가 후련해 보인다. 감각적이고 몰입감 있는 연출이 돋보인다. 2025 선댄스영화제, 2025 프레임라인샌프란시스코국제LGBTQ영화제 상영작.




꿈을 꾸었다 말해요

Tell Me That You Love Me

김조광수/Korea/2025/73min/Color/Drama, Romance/Korean/‘코리아 프라이드’ 섹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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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V 감염인과 미성년자의 편견 극복 로맨스


영화에는 두 번의 머뭇거림이 있다. 중고 거래로 만난 두 사람이 낭만적이고 발랄한 하루를 보내고 침대에 누운 후 첫 번째 머뭇거림이 찾아온다. 경일은 자신이 HIV 감염인인데 미리 말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여기서 멈추자고 말한다. 경호는 천진한 표정으로 그건 별다른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고 두 사람은 다시 섹스를 이어간다. 관계를 마치고 경호가 씻고 나온 후 두 번째 머뭇거림의 순간이 생긴다. 경일은 핸드폰 문자 메시지를 통해 경호가 보육원에서 생활 중인 고등학생이란 걸 알게 된다. 나이는 성인일지라도 ‘고등학생’이라는 데 경일은 거부감을 보인다. 경호는 HIV에 대한 편견을 익숙하게 넘어섰지만, 경일은 경호에게 같은 일을 해주지 못한다.


만듦새의 측면에서 여러모로 아쉬움이 있지만, 감독 특유의 청량한 로맨스 감각을 HIV와 미성년자에 대한 편견과 버무려 풀어낸 문제의식에는 공감이 간다. 그날 이후 반년 만에 재회한 두 사람이 편견을 넘어 만들어갈 로맨스를 가만히 상상해보게 된다. 2025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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