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의 이름은 마리아〉
이제 막 성인이 된 배우 마리아가 발가벗은 채 물이 반 정도 잠긴 욕조에 들어가 있다. 욕조 밖에는 당대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인 중년의 말론 브란도가 앉아 있다. 두 사람은 대화를 주고받는다. 브란도가 다소 거칠게 마리아의 머리를 물속으로 몇 번이나 밀어 넣는다. 이후 ‘컷’ 소리가 울린다. 마리아에게 자신이 너무 거칠었냐고 물은 후, 브란도는 곧바로 일어서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와 욕조를 등지고 서서 대화를 나눈다. 두 남자의 다리 사이로, 민망하고 멋쩍은 표정을 짓고 여전히 나체인 채로 욕조에 앉아 있는 마리아의 얼굴이 보인다. 두 남자는 ‘예술’을 논한다. 여자들은 예술의 도구로 카메라 앞에 소환되지만 발언권을 얻지 못한다. 이 과정에서 느끼는 소외감, 불편함은 ‘예술’로 ‘진실’을 추구한다는 멋들어진 명제 앞에 속으로 삼켜야만 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한 장면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이 장면은, 이 영화 〈나의 이름은 마리아〉뿐 아니라 ‘예술’과 ‘여성’이 관계 맺어온 역사에 관한 하나의 상징적 장면처럼 보인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1972년에 제작된 영화다. 고독에 차 파리를 방황하는 중년의 미국 남성 폴과 결혼을 앞둔 파리의 젊은 여성 잔느가 우연히 만나 아파트에서 익명성을 유지한 채 성적인 관계에 탐닉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다. 현대인의 고독, 대도시의 익명성, 성적 욕망 등을 결합해 질문한 영화라고 한다. 영화는 공개 후 외설 논란으로 홍역을 치렀다. 이탈리아에서는 상영이 금지됐고, 감독과 두 주연 배우는 외설죄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본다면, 이러한 소란은 오히려 영화의 생명력에 도움이 된다. ‘검열’과 ‘외설’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평범한 영화에도 무언가 심오한 비밀이 담겨 있는 듯하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제기한 윤리적 문제는 따로 있다. 마리아가 ‘진실’을 추구하는 ‘예술’로서의 영화 제작 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무엇보다 영화 촬영 과정을 강간으로 느꼈다는 점이다. 잔느가 폴과의 관계를 중단하고 다시 약혼자에게 돌아가려 하자, 폴은 그녀를 강간한다. 그러나 여기서 영화와 현실의 경계는 불분명하다. 영화에서 폴은 버터를 윤활제 삼아 잔느를 강간하는데, 브란도와 베르톨루치는 이를 촬영 당일 즉흥적으로 결정했다. 마리아가 ‘배우’로서가 아닌 ‘소녀’로서 분노와 굴욕감을 느끼길 원했기에, 마리아에게는 이를 사전에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첫 촬영 후 마리아는 고통과 수치심에 눈물을 쏟는다. 그러나 고통스러워하는 마리아에게 ‘예술’을 만들고 있다는 영화 현장의 분위기는 불편하고 수치스러워도 감독의 요구를 따르라는 압박으로 다가간다. 결국 촬영은 베르톨루치와 브란도가 계획한 대로 마무리된다. 인간으로서 한 번, 배우로서 또 한 번. 마리아는 이날 두 번의 강간을 당했다.
이후 마리아의 행보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예술’로 상찬하는 사람 앞에서 마리아는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제대로 터놓을 수 없다. 불편하게 미소 지을 뿐이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추악한 외설’로 취급하는 사람들은 수시로 마리아를 모욕하고 희롱한다.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밝히는 인터뷰는 배우 커리어를 망치고 싶냐는 소속사 대표(남성)의 제지로 무산된다. 이후 마리아에게 들어오는 역할은 자극과 선정성만을 강조한 배역이 많았다. 그나마도 촬영장에서 수시로 반복되는 무례한 요구가 불러일으킨 트라우마로 연기에 제대로 집중하기도 어려웠다. 촬영 당일에 옷을 벗으라는 제안을 거부하면 페이가 지급되지 않는 일도 있었다. 계약이 그랬기 때문이다. 불안과 혼란에 휩싸인 마리아는 헤로인에 손을 대기 시작해 중독 치료소를 드나드는 처지가 된다. 마리아는 조금씩 붕괴한다.
그러나 마리아는 무너지지 않는다. 58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 꾸준히 출연하며 배우로서 커리어를 이어갔다. 〈나의 이름은 마리아〉는 여성 영화 연구자와의 친밀성 구축이 마리아가 배우 경력을 이어가는 핵심 동력이었다고 말한다. 레즈비언 섹스와 친밀성이 마리아에게 구원이 되어준 것이다. 남성들이 구축한 예술의 문법에서 질식해가던 그녀의 목소리가 여성 간의 연대와 사랑으로 사라지지 않고 보존된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 다시 증폭된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이후 〈나의 이름은 마리아〉를 통해 마리아가 영화적으로 온전히 복권되는 데 53년이 걸렸다. 위태롭게 생존하면서도 무너지지 않고 또 다른 예술과 진리의 경로를 만들어가는 여성들에게, 긴장감이 깃들어 있으면서도 이전과 달리 자기 확신을 가진 마리아의 마지막 표정은 하나의 귀감이 되어줄 것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