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룩〉, 〈산양들〉, 〈미스터김, 영화관에 가다〉
장동윤 | 2024 | Fiction | Color | DCP | 83min
페스티벌 초이스 장편 쇼케이스
▶부랑자 타자화를 대가로 한 믿음의 미스터리
이 영화에서, 누룩은 믿음을 상징한다. 양조장 집 딸 다슬은 자기 집 누룩이 특별하다고 진심으로 믿기에 그 누룩으로 만든 막걸리를 늘 가까이 두고 마시며 일상에서 활력을 얻는다. 반면 아빠와 오빠는 그런 다슬을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 오빠가 다슬을 못마땅해한다. 그러던 어느 날 누룩이 사라진다. 막걸리를 마시지 못하는 다슬은 빠르게 생기를 잃는다. 이에 혹시 그 누룩에 진짜 효험이 있는 건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한 오빠, 특별한 누룩으로 만든 막걸리를 찾아다니는 부랑자 패거리들이 다슬과 함께 사라진 누룩을 찾기 시작한다.
단순하면서도 독특한 이야기에서 나오는 기이한 미스터리의 힘이 인상적인 영화다. 같은 대상(누룩)을 두고도 믿음(다슬)과 소유(부랑자들) 중 어떤 관점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특별하고 성스러운 것이 되거나 파멸을 맞이하는 등 서로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통해 믿음의 (종교적) 속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다만 영화가 부랑자 패거리를 재현하는 방식은 다소 불쾌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들은 제대로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며 좀비 떼처럼 누룩과 막걸리를 찾아다닌다. 그리고 정작 누룩(믿음)을 손에 넣은 후에는 그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성급히 먹으려다 오히려 구토를 하고 만다. 즉 이들은 믿음이 귀하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이 귀함을 그 자체로 소중히 여기지 않고 소유하고자 했기에 커다란 불길 속(지옥)으로 사라진다.
(종교적) 믿음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말하려는 감독의 의도에는 공감이 간다. 그러나 이것이 거지, 부랑자를 미련한 족속으로 뭉뚱그려 재현할 이유가 될 수 있을까? 그들이 그저 추하고 더러운 몰골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영화가 화두로 삼는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에서는 되레 그런 자들을 사랑하는 일을 통해 믿음의 가치를 입증하지 않나? 믿음의 은유, 미스터리의 적당한 몰입감에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비윤리적 거지 떼 재현에 대한 의구심은 해소되지 않는다. 〈내 귀가 되어줘〉에서 농인들의 활기 넘치는 순간을 포착한 감독이기에 이 아쉬움이 더 크게 다가온다.
유재욱 | 2025 | Fiction | Color | DCP | 107min
본선 장편경쟁
▶‘표준’을 벗어난 청소년들의 아기자기하면서도 대담한 모험
대학 진학이 모든 곳인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미래를 고민하지 않는 학생은 ‘동물’과 같다. 인혜, 서희, 정애, 수민은 학교에서 그렇게 불린다. 이들은 진학신청서에 아무것도 적어 내지 못하는,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고 집안 형편도 넉넉하지는 않은 아이들, 그래서 학교에서 특별 관리를 받는 아이들이다. ‘산양들’은 그런 네 청소년이 꾸린 비밀 모임이다. 선생님의 지도에 맞춰 대입 면접을 준비하는 대신, 곧 학교에서 철거 예정인 사육장의 동물들을 몰래 돌보는 비밀 모임 말이다.
산양은 아무 데서나 잘 살고, 절벽 사이도 뛰어다닌다. 이 네 명도 그렇다. 어른들의 의심과 관심, 사회적 기대의 바깥에서 ‘가둬진 채 키워져 할 수 있는 게 없는 동물’을 위한 보금자리와 자신들을 위한 아지트를 만드는 이들은 꼭 산양을 닮았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날지 못하는 오리 희선이가 야생에서 힘찬 날갯짓으로 날아오를 때, 희선의 날갯짓은 사회적 통제에 갇혀 사육장의 동물과 닮은꼴이었던 네 청소년의 날갯짓이 되기도 한다. 표준적인 경로를 벗어나 가치 있는 것들을 벼리는 청소년들의 아기자기하면서도 대담한 모험을 넘치는 생동감으로 포착한 영화로, 〈라임크라임〉을 공동 연출한 유재욱 감독의 신작이다.
김동호 | 2025 | Documentary | Color | DCP | 105min
페스티벌 초이스 장편 쇼케이스
▶영화를 향한 증류된 듯 맑고 순수한 열정
이전에 〈영화 청년, 동호〉를 보며 감탄한 적이 있다. 지금의 문체부 공무원 출신으로 영화계에 들어와 여러 반대를 마주하면서도, 영화인으로 거듭나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해 여려 영화 인프라를 조직해 한국 영화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듣는 그의 여정이 새삼 신선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처음 영진위 사장에 부임하고 반발을 마주한 후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영화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고, 이후 부국제를 30년간 성공적으로 이끌며 완전한 영화인으로 거듭났다. 행정력, 기획력과 예술에의 의지를 갖춘 공무원이 왜 필요한지를 되새긴 영화였다.
이 영화는 이제 여든다섯이 된 김동호가 카메라를 들고 영화/관은 무엇인지를 탐색하는 소박한 다큐멘터리다. 그러나 출연진은 결코 소박하지 않다. 이창동, 박찬욱, 봉준호, 차이밍량, 뤽 베송, 문소리, 장준환, 정지영, 김지운, 고레에다 히로카즈, 류승완, 윤가은 등등. 도무지 한 영화에 출연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김동호의 요청에 선뜻 영화/관에 대한 자기 경험과 기억을 들려주고, 영화는 그 답들 속에서 영화의 위기를 타개할 통찰을 길어내고자 한다.
위기의 시대, 오래된 경험과 기억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그저 지나간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낭만 어린 회고에 그치지 않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의 위기에 대한 답은 거장들의 말속에 있지 않다. 여든다섯의 늦깎이 영화인이 카메라를 들고 그 답을 찾으러 다니는 행위 속에 있다. 영화에는 김동호가 카메라를 들고 국내외 오랜 역사를 가진 단관 극장을 오가는 장면이 많다. 그리고 김동호는 그곳에서 영화에 관한 경험과 기억을 채록한다. 영화를 향한 증류된 듯한 맑고 순수한 열정이 그의 발걸음과 카메라의 여정에서 솟아난다. 위기 이후의 영화, 다음 시대의 영화는 여기서 출발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 김동호는 영화에 대한 열정은 소유자의 나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을 담백하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