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독일 공공기관에 문의할 일이 있었다. 나는 독일에서 살았었는데, 당시의 서류 하나를 재발급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발급 절차를 몰랐기에 일단 나의 개인정보와 함께 절차를 묻는 이메일을 보냈다.
독일 공무원은 일처리가 느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답변이 도착하는데 최소 2주는 걸릴 것으로 예상했으나 3일 만에 도착했다! 그러나 답변 내용이 이상했다.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라는 답을 기대했는데 "정식으로 다시 물어봐주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정식으로 물어봐 달라는 게 무슨 뜻인가 보니... 문의 내용을 이메일이 아닌 종이로 달라는 것이었다. 나의 문의가 개인정보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 이메일로는 확인해 줄 수 없다고 했다. 반드시 내용을 종이로 작성 후 자필 서명을 한 뒤 작성한 날짜와 도시 정보를 포함하라는 내용이었다. 대신 내가 외국에 있는 외국인이니 우편으로까지 보낼 필요는 없고 사진으로 찍은 이미지 파일로 충분하다는 보충 설명이 있었다.
귀국 후 한국 시스템에 익숙해져서 그런가 약간 어처구니가 없었다. 독일은 아직도 종이에 이토록 신뢰를 갖고 있는가? 종이의 원본이라면 또 모르겠다. 필요하면 필체 검증도 할 수 있고, 우편으로 보내면 주소로 인한 본인 확인이 어느 정도 될 테니까. 그러나 스캔본은 검증도 힘들고 위조하기도 너무 쉽다. ChatGPT에게 "서명한 문서 만들어 줘"라고 하면 뚝딱 만들어주는 세상이다. 사실상 이메일에 담긴 내용을 그럴싸한 형식으로 재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이메일 내용을 종이 스캔본으로 보내달라는 요구는 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아마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고 여전히 그렇게 해도 되니까'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시스템은 '그렇게 하면 큰일 난다'라는 위기감이 없는 한 좀처럼 발전하지 않는다. 게다가 내 문의는 외국에서 보낸 내용이니 신경을 덜 쓸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그래도 되니까 그렇게 하는 것일 테고 이 방식은 웬만하면 계속 유지되지 않을까 싶다.
독일 공무원이 종이를 사랑하는 건 그냥 그러려니 한다. 약간 불편해지는 것뿐이니까. 세상은 정말 빠르게 바뀌지만, 생각보다 바뀌지 않는 것도 많다. 그러나 적어도 나 개인 차원에서는 늘 배우고 발전하고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자각이 들었다. 나에겐 '그렇게 해도 된다'라는 특권이 없다.
아침부터 좋은 반면교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