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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동혁 Oct 31. 2024

flesh and blood

재일 조선인 청년 노아가 짊어진 blood의 무게

“이해할 수 있겠나? 젊을 때는 심각한 실수를 할 수 있데이. 나쁜 사람을 믿을 수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난 니를 가져서 무척 감사했다. 나와 결혼해 준 이 아버지에게도 감사하고...” -파친코-



  어린 시절 나는 물을 좋아했다. 그 신비함 때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미래소년 코난에 심취했던 탓도 있을 것이다. 그 시절 일기장 글머리에는 ‘오늘은 미래소년 코난을 하는 날이다’라는 문장이 자주 등장한다. 


  한편으로 물은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공기처럼 투명하면서도 쌓이다 보면 그래서 깊어질수록 속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가공할 힘까지 생긴다.

  조사선을 타고 망망대해로 나가본 적도 있다. 거기서 만난 바다 빛깔은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 정도여서 경외심마저 들었다.


  채집을 마치고 돌아와서 하는 일이 있다. 플랑크톤의 분류군을 찾아주는 일이다. 동정identification이란 작업으로 우리의 주민등록 정도가 된다. 전체 윤곽으로 '과'와 '속'을 맞춘 뒤 세부적인 특징을 보고 '종'까지 맞춘다. 혼자 사는지 아니면 친구들과 붙어 다니는지, 섬모가 있는지, 입고 있는 갑옷의 모양은 어떤지 등.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 수단과 작업은 인간 편의를 위한 것이지 플랑크톤의 삶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그들의 생존 여부는 전적으로 외형에 달렸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다르다. 개성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연결돼 있고 어디 출신인지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영어에 flesh and blood란 관용구가 있다. 말 그대로 살과 피, 혈육이다. 혈통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만큼 끈끈한 사이를 뜻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본질을 지칭하기도 한다. 살아 숨 쉬는 인간이라면 살과 피는 결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플랑크톤에 비유하자면 flesh는 플랑크톤의 외형 특징, blood는 분류군이나 계통도 같은 거다. 의미를 더 넓혀보면 flesh는 개성을 blood는 가문이나 국적처럼 공통성질의 묶음을 상징한다.


  그런데 blood의 힘이 유독 강한 사회가 있다.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개성보다 보이지 않지만 개인을 구속하고 결속하는 힘 말이다. 우리가 그렇고 이웃나라 일본이 그렇다. 국적 취득 법만 해도 자국에서 태어난 모든 신생아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미국과 달리 우리와 일본은 최소한 부모 중 하나가 그 나라 국적을 보유해야 한다. 제아무리 재능이 출중하고 그 땅에 오래 거주했다고 해도 소용없다. 어디 혈통인지가 더 중요하다. 


    개인을 보증하고 증명하래주는 증서를 미국은 ID카드라 하고 우리는 신분증 또는 주민등록증이라고 부른다. ID 카드에는 눈동자색깔부터 피부 톤, 머리칼 색깔 등 신체적 특징들이 기재되어 있다. 우리 것에는 주소가 주요항목이다. 

  우리가 몇 통 몇 반에 속해 있는지가 중요하다면 그들은 그 개인의 개성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관할 구역에 나를 신고하고 등록하는 수단이라면 그들은 개인의 특징을 공인하는 과정에 가깝다.


  blood의 구속력은 때로 시공간을 초월한다. 대마나 도박이 합법인 나라에서 대마초를 피우거나 불법 도박을 하더라도 우리는 국내법으로 처벌받는다.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하나 된 단군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성보다는 혈통이나 계통이 정체성의 바탕이 되는 사회는 결속력도 강해 잘 뭉친다. 거기다 종교적 혈통까지 더해지면 그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고 그렇게 뭉친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들을 만들고 그들을 우리와 다르게 대한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놀라는 건 자신이 외국인으로 취급받는다는 사실이라고 한다. 


  이런 무게를 가진 blood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지배하고, 안은 뜨겁고 겉은 차가운 사회가 그 피해를 어떻게 가중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소설 <파친코>는 좀 더 나은 삶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교포들의 삶을 그렸다.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고국을 떠났지만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심한 일본에서의 삶이 순탄할 리가 없다.


  힘겹기는 하지만 4대에 걸쳐 내려오는 순자 가족의 이야기는 장남 노아의 죽음으로 크게 흔들린다. 허망하기까지 한 그의 죽음에 가족은 물론 독자들마저도 망연자실한다. 사회로부터 인정받지는 못하지만 안정된 직장이 있고 네 명의 자녀까지 둔 가장의 죽음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원가족과도 상봉했으니 행복한 일만 남은 게 아니던가.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에서 인류구원이라는 대업에 부름 받고 투신한 성경 속 인물이 보인다. 그와 다른 점이 있다면 고대 노아가 flesh 때문에 무너졌다면 조선인 노아는 blood의 무게에 주저앉는다는 점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성품이 곧았던 노아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목표가 있었다. 열심히 배우고 성공해 일본인처럼 사는 것과 비탄에 빠진 동포를 구하는 것이다. 고결한 신앙의 상징인 아버지 이삭과의 유대도 좌표를 더욱 빛나게 했다.


  분명한 소명의식은 재일 조선인이라고 하는 정체성 혼란을 극복하게 했고 한인 야쿠자 한수의 미심쩍은 후원까지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렇게 해서 그는 꿈에 그리던 대학에 합격했고 원대한 목표도 곧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그러던 그에게 국적보다 근원적인 정체성 위기가 닥친다. 혈통이다. 그의 몸에 그토록 경멸하던 한인 야쿠자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신의 축복 아래 탄생한 거룩한 계보가 아닌 욕정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충격적인 사실을 그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어떻게 아버지를 배신할 수가 있냐고요” 
 “엄마가, 엄마가 제 인생을 앗아갔어요. 전 더 이상 제가 아니에요” 
 노아가 손가락으로 엄마를 가리키며 말했다. 노아는 돌아서서 기차역으로 뛰어갔다. -파친코-


  힘들 때마다 그는 가슴속 깊이 간직해 둔 아버지 유산을 꺼내어 자신을 비춰보았을 것이다. 거기에 비친 모습은 고매한 얼굴에 금테안경을 낀 교사나 성직자였다. 그때마다 그는 ‘그래 이거야’라며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밑바닥에서 미천한 일이나 하며 사는 어리석은 동포들과는 다르다는 확신도 가졌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일본인과 대등한 삶을 살며 미몽에서 헤매는 동포를 교화할 의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다. 그런 그가 하루아침에 교화 대상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고귀하게 빛나는 거울에 비친 모습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다. 끔찍한 사실을 견뎌낼 용기가 없었던 그는 현실 도피를 택한다. 아무 연고도 없는 나가노로 숨어들어가 신분을 속인 채 파칭코업계에 들어간다. 감당할 수 없게 꼬여버린 인연의 실타래를 가위로 잘라내 버린 것이다.


  거기서도 특유의 성실함과 재능으로 상사에게 인정받았고 일본여인과 결혼해 가정도 이룬다. 한편으로는 영적 아버지인 이삭과의 끈만은 놓지 못해 때마다 묘소에 들러 배를 올린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타락한 세상을 더는 지켜볼 수 없던 신이 노아를 부른다. 그리고는 물로 세상을 심판할 것과 그 대비책으로 방주를 지을 것을 명한다. 신명을 받아 든 그는 긴 세월 방주를 지으며 신의 심판을 전한다.


  하지만 그를 믿을 사람은 없다. 있었다면 심판이 내려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노아는 가족과 동물들만 태운 채 방주 문을 닫는다. 흥미로운 건 이때도 계통이 적용된다. 정결한 짐승은 일곱 쌍 부정한 짐승은 한 쌍씩 태운 것이다. 대홍수가 세상을 휩쓸고 노아 가족을 제외한 인류는 전멸하고 만다.


  온갖 비난과 조롱 속에서 노아가 120년 간 배를 지으며 버텼던 것도 의인이라는 정체성과 인류를 구할 적임자라는 자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이삭이 지어준 노아라는 이름 안에는 이처럼 위대한 구원의 서사시가 담겨 있었다.

 

  20세기 노아에게도 절망에 빠져 고통당하는 동포 구원이라고 하는 원대한 꿈이 있었다. 하지만 그 꿈은 하루아침에 산산조각 나버렸고 소명의 원천이던 피도 바뀌었다. 순결한 성직자의 피에서 교활하고 냉혹한 야쿠자의 피로. 그러자 대홍수로 인류가 원초적 혼돈으로 되돌아갔듯 노아도 큰 혼란에 빠지고 만다.


  새롭게 정착한 세계는 blood에 관심이 없다. 그저 육에 관한 일들뿐이다. 모든 걸 잊고 쾌락에 집중하다 대가만 지불하면 된다. 더 나은 내가 되려고 애쓰거나 누구를 가르치려 드는 일도 없다. 내 곁의 사람에게 어떤 피가 흐르는지 알 바 아니다. 어쩌다 보니 고귀함 따위는 애초 관심도 없던 동생 모자수의 삶에 도달해 있었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생각에 그는 허탈했다. 어쩌면 그 세계만이 줄 수 있는 묘한 평안함에 젖어 세상 별 거 아니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가끔은 빛나는 미래를 그리며 스스로를 담금질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영적 의인으로서 아버지 빈자리를 메우고 가족을 이끌 장남으로서 그리고 무지몽매한 동포를 교화할 소명자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져 버린 그의 내면에는 기둥 하나 남지 않았다. 어느 쪽에도 안착할 수 없던 그의 안에서 허무가 싹트고 있었다.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일상과 함께.


  과거 모습마저 희미해져 가던 어느 날 애써 외면해 온 현실이 그를 찾는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찾아온 것이다. 어머니를 만난 그는 업장에서 만난 게 차라리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짧지만 무거웠던 삶을 정리한다.


  업장에서 본 게 다행이란 말은 자신을 부정하고 타인을 기만하는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는지의 고백이다. 만일 그가 업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어머니를 만났더라면 또 한 겹의 가면을 힘겹게 걸쳐야 했으리라. 끊임없이 자신을 감추고 부정하는 사기꾼imposter 같은 삶이 그의 영혼을 얼마나 잠식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애증의 대상인 어머니까지 본 마당에 의미 없는 삶을 지속하는 건 부질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렇게 그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사람, 아무도 믿지 않을 때 홀로 믿음을 지킨 사람’이란 뜻을 가진 이름의 멍에를 벗는다. 그리고는 더 이상 헛된 꿈을 꿀 일도, 자신을 숨길 이유도 없는 세상으로 떠난다. 


  삶이 무너져 내려 바닥을 드러낸다는 건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blood의 가공할 무게와 유령과도 같은 삶에 지쳐버린 그에게는 그럴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더 이상 blood의 멍에를 씌우는 건 작가에게도 무리였던 것일까. 


  태생적으로 나약하지만 삶과 분리될 수 없는 flesh에 대해 조금만 더 깊은 이해와 아량을 가졌더라면 어땠을까. 그 일이 동생 모자수에게 닥쳤더라도 같은 결과가 일어났을까. 아마도 아닐 가능성이 높다. 


  형과 달리 일찌감치 현실로 뛰어 들어 flesh의 삶을 껴안고 사랑했던 그러면 극적인 위기에서 빠져나갈 구멍 한두 개쯤은 발견하지 않았을까.




  flesh and blood, 현생에서 결코 벗을 수 없는 굴레이고 어느 한 면도 부정할 수 없다. 그 자체가 인간본질이기 때문이다.


  원대한 꿈을 꾸며 많은 걸 희생한 한 남자의 비극은 세상사의 원천인 육의 일들(The works of flesh)에 대한 지나친 결벽과 반감에서 오지 않았을까. 순수 혈통과 선민의식에 뿌리를 내린 창백한 그의 정체성은 우리 바람과는 무관하게 닥치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앞에서 중심을 잃고 휘청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다른 조선인들과는 다른 인물’이라는 자화상에는 그의 서명만 들어 있는 게 아니다. 뭔가 큰일을 해낼 것만 같아 보이는 인물이 풍기는 신뢰감을 좋아했던 모든 사람들의 서명이 들어 있었다. 그의 날개 짓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뿐만 아니라 혈통이 노출됨으로써 느끼는 수치심도 남달랐다. 경멸적인 자기 시선에다가 타인들의 평가나 시선까지 내면화함으로써 실제 그가 느끼는 모멸감은 배가 되었다.


  그가 알았으면 하는 부분이 있다. 그가 그토록 선망했던 아버지 이삭의 신앙도 아이를 밴 채 비참하게 버려진 여자를 조건 없이 품을 정도로 현세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신앙은 그렇게 flesh and blood를 껴안은 것이어서 고귀했다. 


  flesh와 분리된 blood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법도, 가문도, 정치도, 종교도 모두 사람 난 뒤에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flesh에 메인 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들을 경원시하고 그들의 아픔에 제대로 공감할 수 없었던 그는 꿈을 꾼 것이 아니라 꿈에 종속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천 년 전 유대의 한 청년이 전통과 혈통에 매몰된 종교지도자들을 겉과 속이 다른 무덤이라며 맹비난한 것도 그리고 자기 피와 살을 먹지 않으면 진짜 생명이 없는 거라고 강조한 것도 어쩌면 그 뜻이 담겨 있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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