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과 폐쇄, 3년 뒤 다시 쓰는 문화유산의 아이러니
2022년 여름, 청와대가 처음 개방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전면 개방을 선언하면서, 그동안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던 공간이 국민에게 열린 것이다. 나는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당첨되어 청와대에 발을 들였다. 사실 시간이 지나면 여유롭게 방문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때는 "역사적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컸다.
첫 방문 때는 준비가 미흡해 건물 내부까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저 정문을 지나 걸어 들어가는 경험만으로도 특별했다. 그 길 위에서, 한국 사회에서 권력이 차지해 온 상징성이 피부로 와닿았다. 몇 달 뒤 다시 내부 개방이 이뤄졌을 때 나는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조금 더 차분한 마음으로 건물 안팎을 살펴볼 수 있었고, 청와대라는 공간이 지닌 무게감을 새삼 느꼈다.
많은 시민이 그곳에서 비슷한 말을 내뱉었다. “완전 구중궁궐이구만.” 나 역시도 같은 감정을 느꼈다. 화려한 단청이나 내부 장식 때문이라기보다, 드넓은 면적과 배치가 주는 위압감 때문이었다. 이미 백 년 전에 신분제가 폐지된 사회에 살고 있지만, 그 공간 안에서는 여전히 어떤 위계가 생생히 남아 있는 듯했다. 머리로는 대통령이 국민의 대표라 이해하면서도, 몸으로는 ‘다른 세계’를 체험하는 듯한 이질감이 찾아왔다.
그 순간 나는 프랑스를 떠올렸다. 프랑스혁명 동안 왕족과 귀족의 재산은 몰수되어 국가 소유가 되었고, 국민에게 개방되었다. 루브르 궁전 역시 그 흐름 속에서 1793년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왕의 전유물이던 공간이 이제는 모두의 박물관이 된 것이다. 혼란 속에서 수많은 문화유산이 파괴·유실되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과정이 “문화유산은 국민 모두의 것”이라는 의식을 태동시켰다.
동시에 나는 루브르가 떠올랐다. 절대 권력의 상징이었던 공간이 시민의 발길에 열렸다는 점에서 두 사례는 겹쳐졌다. 하지만 정부의 시선은 나와 조금 달랐던 듯하다. 개방 직후 “청와대를 베르사유 궁전 같은 문화예술공간으로 조성하겠다”는 발표가 나왔기 때문이다. 베르사유 역시 혁명 이후 국가 재산으로 귀속되어 대중에게 공개되었고, 오늘날엔 공연과 전시가 열리는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그 이름에 붙은 상징성은 미묘하다. 사치와 권력의 아이콘으로 각인된 베르사유를 청와대에 빗대는 발언은 오히려 부정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이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가 한 적이 없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청와대를 거닐며 들었던 복합적인 감정은 결국 이런 질문으로 이어졌다. 권력의 상징 공간이 시민에게 개방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프랑스혁명은 파괴와 약탈, 그리고 새로운 보존의식을 동시에 낳았다. 국민은 지도층의 공간을 분노와 환희가 교차하는 마음으로 접했을 것이다. 한국의 청와대 개방 역시, 권위주의의 상징을 시민이 직접 경험하며 다시 해석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화유산은 건물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경험과 기억까지 포함한다. 청와대 개방은 정치적 목적이 짙게 깔려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정치적 의도와 별개로, 청와대를 걸었던 수많은 시민은 그 공간을 통해 권력과 자신을 새롭게 인식했다.
더 자세히 덧붙이면, 당시 청와대 활용을 담당한 문체부는 “청와대를 베르사유 궁전의 전시 원칙과 마찬가지로 원형을 보존하면서 문화예술공간으로 조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 말은 내게 설렘과 동시에 묘한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원형 보존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거운 과제인지, 실제로 가능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글을 마치며 이렇게 썼다. “앞으로 원형을 어떻게 보존하여 활용할 것인지… 기대해 보자."
프랑스혁명 당시, 공화국의 가치와 혁명 정신을 홍보하기 위해 문화유산을 활용한 동시에 다시는 약탈과 파괴를 하지 말자는 경각심을 통해 프랑스의 유산 보존 체계를 정립한 것처럼, 청와대 개방은 한국에서도 유산 보존에 대한 새로운 담론의 물꼬를 틀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청와대의 문은 다시 닫혔다. 개방은 잠시였고, 문화예술공간으로의 변신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짧은 시간에 스쳐 지나간 실험이었지만, 그 경험은 오히려 더 선명하게 남았다. 시민이 권력의 공간을 직접 걸어본 기억, 그 공간에서 느낀 위압감과 해방감이야말로 청와대 개방이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