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롱박의 장막희곡 4
2021년. 4월 16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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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 주는 장막희곡 <꽃은 됐어요>의 플롯에 대해 고민했다. 지난주에 엉성한 서사 구조를 만들었으니 이제 그 서사가 극적으로 보일 수 있는 플롯을 고민해 보았다.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를 놓고 빼고 그러다 문득 이 고민에 빠져 한참을 생각 중이다.
"왜 파리일까?"
주인공 클레어는 파리로 돌아가고 싶어 하고 돌아간다. 그런데 왜?
물론 프랑스의 파리는 낭만과 예술이 가득한 도시로 유-명하다. 누구든 한 번쯤은 가 보고 싶어 하고 에펠탑을 배경으로 한 사진을 꼭 남겨야 하는 곳. 그런데 우리의 클레어는, 그러니까 그 클레어를 만들어 내고 있는 나는 왜 꼭 파리를 돌아가야 할 곳으로 삼아야 하는 가 말이다. 파리는 클레어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곳일까?
파리는 클레어가 유학을 떠난 곳이다. '패션'을 공부해서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떠난 곳. 지금보다 몇십 년 전 대한민국에서 해외로 유학을 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권이 아닌 나라로 유학을 갈 수 있었다니 대단한 인재였음에 틀림없다. 혹은 확실한 꿈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클레어에게 파리는 어떤 곳이었을까? 동양인 20대 여성이 낯선 언어를 사용하며 낯선 곳에 산다는 것. 가족 하나 없고 모든 것을 혼자 해 내야 하는 곳에서 살아낸다는 것이 어떤 무게로 느껴졌을까?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자신의 꿈을 이뤄내기 위해 매일을 살아낼 수 있다는 것. 그건 또 어떠할까? 벅차게 행복하면서도 조금 불안한, 그리고 매일매일이 자신을 증명하는 날들이 아니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닿고 나니 놀랍게도 나와 클레어가 닮아 있다고 느꼈다. 나 역시 20살이 되자마자 서울로 올라왔다. 친척 하나 없는 서울에 혼자 살면서 학교를 다니고 졸업을 하고 일을 하며 살고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기 위해 외롭고 고된 타향살이를 이어간다는 점에서 나는 클레어와 많이 닮아 있었다.
나의 서울 생활은 그랬다. 첫 3, 4년은 마냥 즐거웠다. 문득문득 외롭기는 했지만 학창 시절 내내 염원하던 공부를 하며 서울에서 자취를 한다는 것이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았고 참 즐거웠다. 나를 포함한 4명의 가족이 늘 함께 아침을 먹고 저녁을 먹던 집에 살던 나는 20살 이후의 혼자살이가 참 좋았다.
첫 3, 4년이 지난 이후의 나의 혼자 사는 삶은 그냥 생활이 되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이 집에서 나를 돌보고 입히고 먹이고 재우는 일. 그게 지금 나의 서울 생활이 되었다. 조금 고독할 때도 있지만 이젠 이게 디폴트가 되어서 전혀 어려울 것이 없어졌다. 가끔 명절이나 시간이 나서 본가에 내려가 지낼 때면 딱 3일까지는 견딜 만 하지만 그 뒤로는 '얼른 서울 집 가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클레어도 그랬을까? 혼자인 삶이 디폴트가 될 만큼 파리에 살았을까? 아니면 꿈에 한 발짝씩 매일 더 가까워진다는 생각에 매일매일이 황홀했을까?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은 아니었을까? 불이 다 꺼진 집에 늦은 밤 돌아가면 내 숨소리 외에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방 안에서 떨진 않았을까? 한국이 아닌 타국이라는 점이 더 클레어를 힘들게 하진 않았을까?
서울에서의 나는 '요롱박 1명'으로 이루어진 단단한 존재다. 하지만 본가에서의 나는 '부모님 2명, 형제 1명 그리고 막내딸 요롱박'이 되어 버린다. 독립성도 필요 없고 훨씬 방심하고 살게 된다. 파리에서의 클레어는 얼마나 스스로를 단단하게 만들어야 했을까?
중심 질문이 무려 "클레어는 파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인 이 장막 희곡에서 나는 더더욱 클레어의 파리를 구체화해야 한다. 그저 흔한 이미지의 파리를 떠올려서는 아주 큰일 날 것이 분명하다. 에펠탑- 루브르- 오 샹젤리제- 하며 퉁칠 것이 아니라 '클레어에게' 파리가 어떤 의미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클레어와 이 이야기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 핑계로 영화 'Midnight in Paris'부터 한번 더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