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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1) - 청춘과 불안

by 사회철학에서 묻다

(1) 서론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라는 구절로 유명한 『데미안』은 헤르만 헤세의 역작이다. 1차 세계대전 도중, 헤세는 『데미안』을 썼고 전쟁 직후인 1919년에 출판되었다. 그는 이미 독일의 유명 작가였기에 『데미안』을 작품성으로만 평가받고자 가명인 에밀 싱클레어로 출판했다. 그의 바람대로 『데미안』의 작품성은 인정받았고, 독일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폰타네상을 받았다. 『데미안』이 사랑받는 이유는 작품의 메시지에 있다. 이 작품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과 함께 대표적인 성장 소설로 평가받는다.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부모와 사회적 요구에 따라 원하지 않는 학업을 해야 하는 청소년에게도, 그리고 이미 많은 삶을 살았지만 여전히 반항하는 장년층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행동해라”라는 『데미안』의 가르침은 삶의 방향성을 제공해준다. 이 작품을 ‘성장소설’로만 읽으면 핵심이 지워진다. 『데미안』은 엘리아데의 『성과 속』, 『파우스트』의 감정적 추구의 한계성, 그리고 니체의 진리에 대한 통념의 파괴와 같은 많은 철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소설은 분량은 얇지만, 함의는 깊다. 『데미안』을 어릴 때 읽었을 때와 중장년층이 되어 읽었을 때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다르다는 점이 이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어린 시절의 우리는 억압적 사회에서 독립적 개인으로 성장하려는 싱클레어를, 중장년층은 복잡한 사회에서 실존을 찾아가려는 싱클레어의 모습에 자기 자신을 투영시키는 것이다.


(2) 줄거리

『데미안』의 주인공은 싱클레어다. 그는 부잣집 막내아들로 가정의 보호를 받으며 자란다. 인자한 어머니와 조금은 억압적인 아버지, 그리고 유쾌한 누나들은 싱클레어를 보호함과 동시에 무료함을 준다. 싱클레어는 세상에는 빛과 어둠처럼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막연한 어둠의 세계에 대한 동경심을 갖는다. 그러한 동경심은 그를 동네 불량배들과 어울리게 한다. 불량배의 우두머리인 프란츠 크로머에게 한 거짓말로 싱클레어는 불안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우쭐거리기 위해 동네 과수원에서 사과를 훔쳤다는 이야기를 지어내는데, 이를 빌미로 크로머는 그에게 돈을 요구하고 부당한 대우를 한다. 그러던 중 싱클레어의 학교에 상급생 데미안이 전학 온다.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는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크로머로부터 구해준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크로머의 괴롭힘은 중단된다. 데미안은 카인과 아벨 그리고 옆에 매달린 도둑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한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해석에 매료되지만, 따뜻했던 빛의 세계 즉 가정으로 돌아와 착한 아들이 된다. 그 후 데미안은 동네를 떠나고, 싱클레어는 다른 지역 학교로 진학한다. 데미안이 떠나고 공허함과 쓸쓸함을 느끼던 싱클레어는 학교의 말썽쟁이가 되고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그러던 중 중성적 매력을 가진 베아트리체를 만나게 되고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그 감정은 싱클레어를 다시 충만하게 만들고 감정을 표현한 그림을 그리게 한다. 그리고 그는 그 그림을 데미안에게 보낸다. 싱클레어는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라는 답장을 데미안에게서 받는다. 그는 아브락사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도서관을 찾아다니지만 실패한다. 하지만 신학 교육에서 악마의 이름이라는 정보를 얻는다. 싱클레어는 우연히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를 만나는데 그에게서 아브락사스뿐만 아니라 다양한 삶의 지혜를 얻는다. 하지만 그는 피스토리우스가 낡은 지식에만 얽매일 뿐 스스로 창조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스승과 결별하며 자기만의 길을 떠난다. 싱클레어는 마침내 데미안과 그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만나는데, 에바 부인과 사랑에 빠진다. 그는 지금의 공동체와 연대가 허약하고 금세 부서질 것 같다고 생각한다. 후에 전쟁이 터지고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모두 전쟁에 참여한다. 부상당한 싱클레어의 옆 침대에 데미안도 부상을 당해 함께 누워 있게 된다. 그날 밤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깊은 대화를 나누며 한 몸이 됨을 느낀다. “내면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라는 결심을 하고 소설은 끝이 난다.


(3) 엘리아데의 성과 속, 데미안의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소설 『데미안』의 초반부는 종교에 대한 데미안의 새로운 해설이 주를 이룬다. 맨 첫 장에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의 대립은 엘리아데가 그의 책 『성과 속』의 내용을 연상시킨다. 엘리아데에 따르면 성/속의 구분은 인간이 세계를 견디는 방식이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성스러운 장소와 속스러운 장소를 나누었고 성스러운 장소에 살고자 하는 본능과, 속스러운 장소를 정복하고 성스러운 장소로 만들고자 하는 본능에 따라 살아왔다는 것이다. 이는 원시 종교부터 기독교까지 모든 종교에 해당된다. 원시 종교를 보면 특정 물건에 성스러움을 부여하고 조심히 여기며 특정 행동을 타부시한다. 기독교는 교회를 성스러운 장소로 여기며 교회의 의식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이에 따르면, 종교는 인간의 의식적 행동일 뿐만 아니라 특정 물체에 적용되는 실질적 행위이기도 하다. 하느님이라는 존재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느끼고 만날 수 있는 하느님이 투영된 물질적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말이다. 성과 속을 나누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 이유는 인간의 특징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인간은 확실성을 추구한다. 불확실성은 인간을 불안하게 한다. 따라서 인간은 세상을 인과관계에 따라 해석하려고 한다. 성과 속을 나누는 인간의 본능은 여기서 출발한다.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자연에서 성스러운 장소와 속스러운 장소가 구분되지 않는다면, 어떤 장소를 기점으로 활동해야 할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기점이 될 성스러운 장소를 정하고 그 장소를 기점으로 모든 활동을 계획한다. 또한 확실성의 추구는 자연 법칙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 번개가 치는 이유는? 비는 왜 오는가? 갑자기 가뭄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자연 법칙의 설명으로 과거에는 고대 종교를 선택했다. 하지만 자연을 지배하는 존재는 성스러운 존재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연 법칙은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거부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을 성과 속으로 나누는 것이 본능이 된 것이다.


둘째, 인간은 생각하고 사고하기에 자기 본질에 대한 의문을 가진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식물은 사고하지 않는다. 또한 본질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 사자는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사냥한다. 어떠한 사자도 “왜 나는 사냥해야 하는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가젤과 협동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하지 않는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은 인간을 죽음과 마주치게 한다. 왜냐하면 나의 본질의 부재는 나의 부재를 뜻하고 이는 또 다른 불확실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은 절대자의 존재를 찾고 이는 종교로 귀의한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절대자 종교의 존재는 그들을 섬길 물질적 성소가 필요하고 인간은 이에 따라 성과 속을 나눈다. 이러한 인간의 본질은 종교에만 귀속되지 않는다. 이러한 본능은 사회, 정치에도 적용된다. 『데미안』에 나온 대로 인간이 보는 긍정적인 세계 즉 성스러운 세계와 부정적인 세계, 즉 속스러운 세계로 나뉘는 것이다.


엘리아데의 분석에 따르면, 현대 종교인 기독교나 천주교 그리고 이슬람이 신의 말씀을 이어받은 특별한 종교가 아니라, 본래 인간이 성과 속을 통해 추구하는 종교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종교는 우리가 성스러운 존재인 신의 은총을 입고 이 세상에 나왔으며, 그들의 말을 이해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원시 종교부터 성과 속을 나누고 성을 존경하고 따르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지금의 종교가 예전 종교의 연장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데미안』과 엘리아데의 『성과 속』의 공통점을 읽어낼 수 있다. 『데미안』은 카인과 아벨 그리고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을 통해서 성서와 종교를 비판한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비판은 지금의 종교가 가지는 관념은 진리가 아니라 종교적 헤게모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카인의 이마에 문신을 한 이유가 카인이 문제아라서가 아니라 카인을 두려워한 사람들이 정해놓은 표시라든가, 예수님에게 회개한 도둑보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도둑이 더욱 인간답다는 데미안의 해석은 종교적 도그마에 대한 도전이다.


엘리아데의 분석처럼 지금의 종교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면, 종교적 해석은 종교 지도자가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성과 속을 나누는 본능을 이용한 지도층이 자신의 특권을 위해 성스러운 것을 더욱 부각시키면서 사회적 지위를 얻는다. 예를 들어, 성스러운 장소를 주관하는 교회는 성스러움을 추구하는 본능을 부각시키면서 신자들을 지배한다. 문제는 성과 속은 본질적 진실이 아니라 본능에 따른 시류적 진실이기에 언제든지 특권이 박탈될 수 있다. 하지만 지배 계층이 특권을 얻는 순간 상부 구조에 대한 통제권도 얻는다. 법, 교육, 정치 등을 통해 인간의 의식의 형성에도 관여하면서 도그마를 발명한다. 이 도그마는 흔들리지 않는 진실이 된다. 도그마는 카인을 조롱하고 신념을 지킨 도둑을 비난하며 아브락사스를 악마로 낙인찍는다. 『데미안』이 두 개의 세계와 종교 비판을 통해 내리는 결론은 “종교적 도그마뿐만 아니라 모든 도그마에 저항하라.”라고 생각한다. 가장 뿌리 깊은 종교가 거짓일 수 있다면 그 어떤 것도 거짓일 수 있기 때문이다.


(4) 어두운 세계와 교류를 통한 성장

성과 속을 나누고 성스러운 장소에 머물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지만, 속스러운 것과 교류하고자 하는 것도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은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데, 성스러움은 이미 체제를 형성했기 때문에 이는 인간을 속스러운 환경으로 내몬다. 미국의 서부 개척 또한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미국을 영국으로부터 지켜낸 동부의 성스러운 장소를 떠나 새로운 기회를 주는 속스러운 서부로의 진출은 인간의 본능의 발현이다. 따라서 싱클레어가 평화로운 가정에 살면서 계속해서 어두운 세계에 대한 동경을 갖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위에서 기득권층은 성스러운 곳에 자리 잡은 자기들의 특권을 유지하고자 하는데, 이는 속스러운 장소와의 교류를 타부시한다. 『데미안』에서도 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싱클레어는 프란츠 크로머 무리와의 교류를 숨겨야만 했고, 크로머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밝히기를 꺼려했다. 이러한 사회적 억압은 어두운 세계를 부정적인 세계로 인식하게 만든다. 또한 기득권층은 상부 구조를 이용해 밝은 세계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밝은 세계에 남기 위한 여러 가지 의무를 부여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기득권층은 인간의 행동을 제한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주체와 객체, 긍정과 부정의 교류를 통한 변증법적 발전을 이룬다. 싱클레어는 크로머 무리와의 교류와 부당한 대우, 그를 통한 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통해 한 단계 성장한다. 기독교적 색채가 강한 싱클레어의 가족은 가부장제도를 답습한다.


“그는 나의 아버지였고, 나는 그를 두려워했다. 그의 목소리, 그의 눈빛, 그의 모든 행동은 나에게 권위와 법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목에서 싱클레어는 아버지를 두려운 존재로 여기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통적 가부장제에서는 아버지는 절대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이는 인간의 심리와 연관이 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동물처럼 강한 발톱이나 빠른 다리를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모님의 존재는 필수다. 아이는 부모님의 도움을 갈구하게 되고 심리적으로 의존한다. 가부장제에서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강하고 결정을 내리는 중심 역할을 하는데, 이런 아버지의 존재는 어릴 때 아이들의 두뇌에 명백하게 각인된다. 따라서 가부장제 속에서 아이들은 아버지에게 맹목적인 복종을 보여준다. 싱클레어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크로머와의 교류를 통해 아버지의 존재를 의심하게 된다.


“나는 아버지가 내게 말했던 선과 진리의 세계가 더 이상 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며, 내가 경험하는 혼란과 두려움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었지만, 이제는 그가 모르는 것들이 더 많다고 느꼈다.”


이 대목에서 싱클레어는 아버지가 더 이상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언제든지 나는 어두운 세계, 즉 욕망의 세계, 그리고 아버지가 부정적이라 말하는 그 세계에서 배울 것이 많다는 점을 깨닫는다. 물론 이러한 경험이 싱클레어에게 내면의 안정감을 주진 못한다. 오히려 불안하고 우울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하지만 이는 『데미안』의 주제와 일맥상통한다. “새로운 세계와의 교류는 인간을 성장시킨다. 다만, 인간의 성장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싱클레어는 고통스러웠고 불안했지만, 아버지와 분리하고 새로운 세계의 의미를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준비를 한다.


(5) 베아트리체 그리고 에바 부인

『데미안』에서 베아트리체와 에바 부인은 싱클레어에게 사랑의 대상이 된다. 무릇, 인간은 사랑의 감정을 통해 한 단계 성장한다는 인식을 가진다. 하지만 헤르만 헤세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두 가지 다른 사랑을 통해 보여준다.


먼저 베아트리체는 『파우스트』의 마르가레테와 비슷하다. 『파우스트』에서 마르가레테는 파우스트의 심리적 도피처다. 파우스트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고 있는 학자이지만, 대지의 령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세계의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는 그를 절망의 늪으로 빠뜨린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악마로부터 젊음을 얻게 되고 마르가레테와 사랑에 빠진다. 확신이 무너지면 감정이 대체재가 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감정은 자신의 통제하에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또한 신화, 교육 그리고 사회로부터 사랑의 중요성을 배웠기 때문에 사랑은 고결하고 완전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파우스트에게 마르가레테는 사랑의 감정이 우선시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불안을 지우기 위해 소비되는 다른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베아트리체 또한 마찬가지다. 싱클레어는 베아트리체를 보고 사랑에 빠졌지만, 그 흔한 교류 한 번 하지 않는다. 인생의 불확실성으로 술과 음담패설에 빠진 싱클레어는 다른 무언가를 얻고자 했다. 그게 삶과 세상에 대한 확실성이길 원했지만 데미안의 부재는 그런 확실성 또한 어둠 속에 빠뜨렸다. 이에 싱클레어는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통해 확실성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물론 이런 소비적 사랑은 확실성을 추구하는 인간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싱클레어 또한 이를 어렴풋이 알고 있는 듯하다. 그가 베아트리체를 사랑의 대상으로만 간주하고 어떠한 개인적 교류도 가지지 않은 것이 이를 보여준다. 베아트리체와 교류를 하는 순간, 확실성의 감정이 다시 불확실성이라는 구렁텅이로 빠질 것이라는 그 불안감이 그를 주저하게 한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이를 명확히 기술한다. 그는 사랑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일 뿐만 아니라 자기 성찰과 성숙을 위한 행동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상황이 이끄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가 의미가 있어야 한다. 사랑은 두 인간의 능동적 발전에 대한 기반이 되어야 하기에 진정한 사랑은 인간의 발전을 동반한다. 이런 의미에서 싱클레어가 느끼는 마르가레테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곧 사라지고 그의 감정은 데미안에 대한 감정으로 대체된다.


에바 부인은 마르가레테와 다르다.


첫째, 에바 부인과의 사랑 자체가 사회의 통념, 즉 밝은 세계가 추구하는 사랑과 다른 면이 있다. 에바 부인은 데미안의 어머니로 유부녀이자 싱클레어 친구의 어머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싱클레어가 친구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과의 사랑을 하는 행위는 타부시되는 행동이다. 하지만 그녀와의 사랑은 싱클레어가 어두운 세계와의 교류뿐만 아니라 내면의 목소리에 따른 행동이기에 주체적 행동이다.


둘째, 마르가레테와 다르게 싱클레어는 에바 부인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한다. 그는 에바 부인과의 영적 사랑과 관념적 사랑 모두를 추구한다. 싱클레어는 마르가레테와는 다르게 에바 부인과의 교류가 그들의 관계를 완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에바 부인은 종속적 혹은 변화하는 관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싱클레어가 추구하는 관계가 에바 부인이길 원하고 또 에바 부인과의 사랑이 싱클레어가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데 탄탄한 기반이 되길 원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통합하는 힘이다. 사랑이란 소유하거나 지배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자신을 초월하여 다른 사람의 존재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에바 부인은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준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주체성을 사랑으로 발현시키는 존재다. 이에 싱클레어는 에바 부인과의 사랑이 데미안과의 관계만큼 중요하고 본능적인 성의 감정을 충족시켜준다는 면에서 보다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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