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이방인』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로 시작한다. 이 한 줄이 이 소설의 전부를 예고한다. 세계는 우리의 설명을 종종 거부한다. 그 앞에서 사회는 규범과 절차로 ‘설명된 의미’를 강요하고, 개인은 자기 경험의 진실을 잃는다. 『이방인』은 바로 그 틈, 부조리와 체제 사이에서 개인이 어떤 언어로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다.
2. 카뮈의 부조리와 ‘이방인’
카뮈가 그에 저서에서 묘사하는 이방인은 말 그대로 이방인을 지칭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문화와 지역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이방인이 아니라 개인의 실존을 깨닫고 현실 세계의 부조리에 고통스러워하는 이방인이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아무런 감정이 없고, 눈물조차 흘리지 않는다. 또한, 장례식 내내, 피로를 호소하고 장례식 참석으로 이루지 못한 잠에 대해 생각한다. 여자 친구와 결혼이라는 단어를 아무 의미 없이 내뱉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꺼리는 “포주”와 친구 관계도 스스럼없이 맺는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관습에 순응하지 않는 이방인의 태도이다. 1부의 뫼르소는 감각의 현재에 솔직한 인물이다. 그는 관습적 애도/도덕 어휘를 거부하며, 더위·피로·수면·섹스 같은 몸의 진실을 숨기지 않는다. 이 솔직함이 곧 사회의 언어와 충돌을 예고한다.
그토록 가기 싫은 회사에 매일 성실히 출근하는 이유는 생존을 위한 소비를 위함이고, 마리를 볼 때마다 느끼는 성적인 충동은 자기 통제에서 벗어난 욕정에 불과하다. 하지만, 재판장에서고 엄마의 죽음을 넘어서고 자기 죽음을 인지할 때 그는 진정한 이방인으로 발전한다.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거짓을 말하지 않고, 자기 죽음에 대해 논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는 재판장에 분노를 느낀다. 담배와 여성과의 육체적 관계의 자유를 빼앗긴 뫼르소는 육체적 욕망이 아니라 자기가 진정 실존으로 느끼는 즐거움을 갈구하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밤하늘, 감옥의 벽들, 공기 그리고 과거의 기억 모든 것이 나를 진정으로 즐겁고 행복하게 느끼게 해 준다는 뫼르소의 생각은 진정한 실존으로 향하는 그의 몸짓이라고 생각한다.
실존주의(사르트르)의 명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비교 틀로 유익하지만, 카뮈의 핵심은 부조리—의미를 갈망하는 인간과 침묵으로 답하는 세계의 충돌—다. 그는 스스로를 실존주의자가 아니라 부조리의 사상가로 놓는다. 모든 인간은 아무 이유 없이 세상에 내 던져졌기에(피투), 존재 이유와 목적이 없다. 의자는 사람들이 앉아야 하는 목적을 타고 태어났기에 존재가 실존보다 앞서 정의됐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아무 목적 없이 태어났고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목적과 본질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이자 나약하고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실존이 사회의 관념을 따라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실존은 자본주의의 관념과 담론에 따라 형성된다. 돈을 벌지 못하는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 혹은 분배를 주장하는 인간은 위선자와 같은 관념과 담론은 사람들의 실존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카뮈가 시지프신화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실존주의의 시작은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우리가 느끼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현상학과 비슷한 것이다. 나의 실존에 영향을 미치려는 외부의 영향을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삶의 목적을 자유롭게 세울 수 있을 때, 자기의 실존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뫼르소는 1부에서부터 실존성을 가질 수 있는 인간상이었으나 죽음을 인지하기 전까지는 육체적 본능과 생존이라는 일차적 감정에 휘둘리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진실로 사회체제 즉 재판 과정에 저항하는 순간 그는 실존에 더욱 다가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그의 정상은 더욱 풍요로워졌고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졌을 것이다.
3. 아랍인의 죽음과 재판
아랍인의 죽음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다. 아랍인과 단둘이 대치하기 전에, 뫼르소와 레이몽은 우연히 해변에서 마주쳤고 싸움이 일어났다. 뫼르소는 더 큰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레이몽의 총을 맡아 두었다. 우연히 해변을 거닐 다 그때 아랍인을 만났다. 그리고 해변의 빛과 열, 식민지 태양 아래 반짝이는 칼날과 권총의 금속성—감각의 과잉이 판단을 압도한다. 첫 발 뒤 이어지는 추가 네 발은 ‘사실의 과잉’처럼, 부조리의 공명을 높인다. 세상의 행동은 아무 이유가 없다. 인간의 가진 오성과 이성으로 세상을 판단할 때, 인간의 판단과 세상의 행동 사이의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를 느낀다는 것이 그의 부조리 철학이다. 그날 태양이 강력하게 비추지 않았다면, 아랍인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 레이몽의 총을 맡지 않았어도, 아랍인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우연의 결과로 인한 죽음은 부조리의 죽음일 뿐, 어떠한 논리와 이성도 이를 설명할 수 없다. 어머니의 죽음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뫼르소는 아랍인과 대치 중 느끼는 태양이 자신이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느꼈던 태양과 비슷하다고 이야기했는데, 이는 어머니의 죽음도 세상의 무관심과 무이성의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하지만, 아랍인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실존성에서 아랍인의 죽음이 보여주는 것은, 죽음에 대한 인식의 결여로 인간의 실존을 파악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카뮈는 “이방인”에서 아랍인과 재판장 그리고 검사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재판장과 검사 또한 아랍인과 비슷하다. 아랍인은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몰라서, 자신을 억압하고 옥죄는 프랑스 자본주의에 맹목적으로 따른다. 재판장과 검사는 고등 교육을 받고 지배계급의 지위를 누리고 있지만, 죽음을 인지하지 않고 사회체제에 따른다는 면에서 불행한 인간이다. 재판관은 종교라는 도피처로 자신을 대피시켰고, 검사는 사회 법체계로 자신을 정의하고 있다. 둘 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논하는 막대한 권리를 가지면서도 타인의 실존과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 이들은 자신을 정의하고 특권을 주는 체제에 순응하면서 삶의 만족을 누리고 있을지 모르나, 그들 또한 갑작스레 다가오는 부조리한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떠한 저항도 실존을 찾을 수도 없다. 아니 찾으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면에서 시기는 다르겠지만 아랍인, 재판장, 검사의 죽음은 모두 부조리할 것이고 그들은 어떠한 의미도 찾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나, 진정한 행복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 인간의 영혼은 소크라테스가 혐오하던 배부른 돼지로서 소멸할 뿐이다.
또한, 카뮈는 재판의 시대에서 보여주는 재판을 부정하고 있다. 자신의 힘과 권력에 취해 힘과 권력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그 시대의 재판은 지금과 다르지 않다. 재판 내 내, 재판장과 판사는 뫼르소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의 변호사 또한 마찬가지다. 그 시대가 원하는 의미에 따라 범죄자를 재단하고 속단할 뿐이다. 소설 속의 뫼르소의 외침처럼 그의 살인을 재판하는데, 엄마와 그의 관계가 왜 중요하단 말인가?? 여자 친구와의 성관계 그리고 해변으로의 나들이가 왜 사형을 내리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재판은 인간의 실존을 본인의 체제와 이익을 위해 빼앗고 대신 정의 내려주는 사회의 폭력으로 보인다. 그 사람의 생각이나 진실과는 관계없이 개인의 자유를 빼앗아 갈 수 있는 재판을 통해 지배체제는 인간을 교육하고 훈련한다. 그러한 행위의 목적은 체제에 순응하고 반항하지 않는 인간을 길러내는 데 있는 것이다.
4. 어머니의 죽음과 뫼르소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무관심한 인물로 보이나, 책의 곳곳에서 이를 부정하는 표현이 속속들이 드러난다. 어머니가 없는 방에서 허전함을 느끼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뫼르소의 모습은 사회의 또 다른 폭력을 보여준다. 어머니와 뫼르소의 관계는 뫼로스의 실존을 정의한다. 또한, 그들의 개인적 관계에 의해 형성된 유대감을 기리는 방법 또한 개인의 영역이다. 하지만, 사회는 사회 문화와 관념이라는 폭력 아래, 뫼르소에게서 어머니를 기리는 권리마저 빼앗아 간다. 어머니의 기나긴 장례식에 참석해야 하고 친구들과 함께 밤을 새야 하며 눈물을 보여야 한다. 이러한 행동에서 벗어나는 인간은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뿐만 아니라 뫼르소의 경우에는 목숨을 까지 빼앗아 간다. 이러한 사회적 폭력과 별개로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2가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는 어머니가 죽음 앞에서 더욱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양로원에 보내지 않고 부양가족이 있을 때는 가족이 부양해야 한다는 사회적 관념에 저항하고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냈기에 어머니는 더욱 자유로웠다. 친구들도 만났을 뿐만 아니라, 그 나이에 페레즈라는 남자 친구와 좋은 추억을 나눌 수 있었다.
둘째, 어머니의 죽음은 야스퍼스가 이야기한 한계 상황으로서의 죽음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야스퍼스는 다른 사람의 죽음은 인간은 모두가 죽는다는 객관적 사실로서만 작용할 뿐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나에게 주관적이고 내밀한 사실이 되고, 이는 한계상황이 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한계상황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인 개인은 타자의 죽음으로 영향을 받고 그에 기반이 된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다. 뫼르소 또한 마찬가지다. 오히려 책에 나와 있는 여러 가지 사회적 폭력에 의한 개인 추모의 방해가 뫼르소에게 한계상황을 더욱 각인시키는 아이러니가 되었다. 개인적 방법으로 추모하지 못하고 사회적 폭력에 이리저리 쓸렸던 뫼르소는, 계속해서 어머니의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한계 상황은 뫼르소가 죽음에 대해 인지하고 사회의 체제에 반항하여 실존을 찾아가는 여행으로 밀어 넣었던 거 같다. 이를 보여주는 소설의 구조가 바로 죽음을 선고받고 죽음을 기다리는 소설의 끝맺음과 어머니의 죽음을 생각하며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소설의 전반부이다.
5. 이방인의 현대적 의의.
이방인은 과거에 쓰인 소설이지만, 현대에서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실존을 잊은 삶을 살아간다.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는 자본을 갖추지 않은 삶은 의미 없다고 확성기에 대고 소리친다. 우리를 둘러싼 인터넷, SNS 등 각종 매체는 자본주의의 파수꾼으로 우리에게 옳은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고 낙오자를 정의하고 인민 처단을 약속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실존과 자아를 파괴하는 것도 모른 체 북한의 인민반 역할을 자청한다. 우리는 자본주의에 저항하기는커녕, 스스로 이데올로기의 파수꾼이 되기도 한다. 친구의 삶을 평가하고, SNS에 자발적으로 이미지를 올리며 체제를 복제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이방인은 실존을 찾고 부조리에 반항하는 삶에 대한 청사진을 제공한다. 나를 이끌어 가는 사회체제를 의심하고 반항하는 삶. 나의 노력과 관계없이 나를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에 대항하여 나의 삶을 사는 삶. 마지막으로, 나의 소중한 사람들은 나를 찾는 여행에 가장 좋은 동반자라는 생각이다. “이방인”은 쉬운 책은 아니지만, 생각할 것이 많은 책이다. 특별한 결과에 대한 기술이 없기 때문에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방인』은 실존에 대한 철학서이자,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에 던지는 날카로운 질문이다. 무엇이 진실이고, 누구의 삶이 진짜인가? 그 질문을 던지는 순간, 우리는 이미 체제의 문법이 아니라 나의 문장으로 말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