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 첫날엔 신발장 정리를
눈을 살짝 떴다. 방 안이 밝다. 오마이갓, 늦잠이다.
휴대폰 액정 속 숫자는 8시 30분.
내 소중한 육아휴직 첫날을 이렇게 늦잠으로 시작하다니! 그 동안 머릿속으로 수십 번 그려왔던 오늘 이 시간의 나는 새벽에 운동을 끝내고 가족을 위한 아침상을 차린 후에 상냥하게 딸에게 반찬을 권하고 있어야 하는데 첫날부터 망했다.
이유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지난 금요일 밤 나의 육아휴직 축하 겸 환송을 위한 회식이 2차까지 이어졌고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과음의 여파는 일요일까지 계속됐다.
핑계와 변명이 뒤엉켜 굴러가는 머릿속 한 쪽 구석에서 시작부터 어긋난 나의 스케줄표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내 계획표에 아이와 손잡고 걸어서 유치원 등원하기도 있었다.
-'깨울까?'
아직도 쿨쿨 자는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니 너무나도 평화롭다. 요즘 코로나바이러스로 시끄러운데 유치원을 보내도 불안하겠지? 그래 오늘 유치원 쉬지 뭐, 휴직 오픈 선물이다.
-'뭘 해야 할까? 뭘 하려고 했지?'
순간 신발장이 떠올랐다. 작년 가을 이사 온 후 다른 곳은 대충 정리가 됐는데 신발장은 이삿짐센터에서 쑤셔넣어준 그 모습 그대로다. 손 댈 엄두가 안 나서 늘 휴직하면 정리하고 싶은 1순위였던 곳이다.
줄넘기 세 개, 우산 여섯 개, 없는 줄 알고 주문한 미세먼지 마스크는 20개나 있었네. 혹시나 몰라 버리지 못한 온갖 더스트백과 부직포가방, 각종 보자기들도 한 칸을 차지한다. 치약, 칫솔, 리필용 세제까지. 신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신발이 아닌 쟁여둔 생필품이라니. 물건들을 제자리에 돌려보내고 나니 작다고 생각했던 신발장 곳곳에 빈 공간이 생겼다.
어쩌다 보니 시작했지만 신발장 정리는 꽤나 괜찮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마치 뒤엉킨 일상을 제자리로 돌리기 위한 의식이라고나 할까. 그 동안 바쁘게 회사와 집을 오가는 동안 내 삶의 많은 것들을 돌보지 못하고 방치했었다. 마치 신발장처럼 말이다. 맞벌이 엄마의 일상은 결승선이 없는 이어달리기를 하는 것같다. 내가 멈추거나 속도를 줄이면 그 다음 주자에게 부담이 가기 때문에 바통이 쥐어졌을때 최대한의 속도로 달려야 했다. 같은 레이스를 달리는 남편과 아이 역시 지친건 마찬가지일터, 휴직 기간 동안 천천히 여유로운 일상으로 즐기고 나와 우리 가족 모두에게 재충전의 시간을 선물하고 싶다.
신발장에 이어 아이 책장 정리를 시작할 때 쯤 남편과 아이가 합류했다. 다년간 다져진 팀워크(라 쓰고 나의 잔소리라 읽는다)로 책장정리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늘 우리 뭐할까?"
늦은 아침식사가 마무리될 때쯤 던진 내 질문에 눈동자 네 개가 동시에 나를 쳐다본다.
그 중 작고 귀여운 눈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도서관! 우리 도서관 가자!"
햇살은 따뜻하고 공기는 깨끗했다.
평소라면 점심시간 끝나고 다시 사무실 책상에 앉아있을 시간인데 나는 남편과 아이와 함께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서관을 향하고 있다. 킥보드를 타고 먼발치 앞서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행복이 별건가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휴직 첫날인데 기분 어때?"
남편이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