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남자친구가 있다.
3학년에 이어 4학년때도 같이 반이 된,
유머러스하고 친절하며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도 좋은 밤톨 같은 한 아이가
내 딸의 남자친구란다.
지난 4월, 어느 오후에 있었던 일이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온
딸과 전화 통화를 했다.
유독 목소리가 하늘 끝가지 닿을 만큼 들뜬 아이는 조잘조잘 쏟아내기 시작했다
- "엄마 축하해 줘 나 남친생겼어!"
- "응? 어떻게 된 거야? 00 이가 사귀쟤?"
- "아니! 내가 고백했지!"
잠들기 전 대화 나눌 때마다 그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설레하던 딸에게
'그래, 지금처럼 좋은 친구로 지내면 되는 거야'
라며 '의도가 담긴' 조언을 했던 게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내 딸은 하고야 말았단다, 고백을!
아이고 아부지요..!
- "와! 축하해. 어떻게 말했어?
00 이는 뭐라고 대답했어?"
- "뭐, 내가 좋아한다고 말했지"
- "그랬더니?"
- "응, 그랬더니 00 이가'오늘부터 1일이네'
이렇게 대답했어"
사람 없는 공간에서 속삭이며 통화하던 나는
돌고래 비명을 지르고야 말았다.
본의 아니게 로맨틱한 장면을
1열에서 직관해 버린 기분이다.
딸은 3학년 2학기부터 이 친구를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그 남자애는 3학년 1학기부터
딸을 좋아했단다.
이런 '운명적인' 사연도 함께 들으니
인기 로맨스 드라마급 달달함에
나는 자동 오두방정 모드가 돼버렸다.
'요즘애들'이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내 안에서 터져 나오는 감탄을 표현할 단어가
'요즘애들'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요즘애'가 바로 내 딸이라니.
그날 온몸으로 깨달았다.
엄마 노릇 10년 만에 완전 새롭고
어려운 퀘스트를 만났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만의 독립된 세계는 분명히 존재하고 딸은 이미 그 세계를 여행 중이라는 것을.
내가 고백을 한 것도 아니고 고백을 받은 것도
아니지만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러다 이런저런 걱정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 '친구들 사이에서 놀림받는 건 아닐까?'
- '공부를 소홀히 하면 어쩌지?'
- '핸드폰만 붙잡고 살 수도 있어'
조급증이 발동해 이런저런 염려를 하는 나에게
딸은 시원하게 어퍼컷 한 대를 날렸다.
- "엄마, 남친이 생겼다는 건 남자아이들 중에서
베프가 생겼다는 거야. 비밀이나 고민도 말할 수
있다는 거야.
엄마는 왜 자꾸 걱정을 하는 거야. 축하를 해줘야지"
아 그렇구나,
순수하고 예쁜 관계에 필터를 씌운
이 엄마를 용서해 다오.
아이와 전화통화를 끝낸 나는 사무실로 돌아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토독토독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여보,
00이 남자친구 생겼어
00한테 고백해서 오늘부터 1일이래
이 적극적인 여성을 우짜면 좋노
걱정했더니 하는 말이
"이건 축하할 일이야 마음 고민 털어놓을 남자 절친이 생긴 거야"
머쓱, 우리 오바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