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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항아리 Feb 17. 2020

책가방과 책상

- 초등학교 입학 2주 전


휴직한 지 2주가 흘렀다.

그동안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 준비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무엇보다 아이가 쓸 책가방과 책상을 구입해서 큰 숙제를 하나 끝낸 기분이다.


아이가 고른 책가방은 연보라와 베이지색의 심플한 기본 가방이다.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핑크에서 벗어나 보라를 선택하다니 아이가 또 한 뼘 자랐나 보다. 초등학교 저학년 동안 사용해야 하니까 너무 유치하지 않아야 하고 가벼우면서 수납공간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편하게 세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내 기준에도 부합했기에 가방 구입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책상은 고를 때는 보다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 인터넷 검색으로 마음에 드는 모델을 정한 후 매장을 찾아 실물을 꼼꼼히 살펴봤다. 나는 책상 앞에 서서 아이가 자라서 책상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났을 때를 상상해봤다. 숙제를 하고 일기를 쓰겠지. 친한 친구에게 줄 편지를 쓰거나 혼자만의 다이어리도 꾸밀 테고.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시험기간에 벼락치기 공부를 하고 온라인 게임을 하다가 카톡 수다에 빠져 키득거리는 모습도 스쳐 지나갔다. 아이가 오래 사용할 수 있는 널찍한 책상과 서랍장, 의자까지 풀세트로 구입했다. 나는 매장 문을 나서면서 딸에게 말했다.     


- “진짜 좋겠다. 부러워”    


딸은 대답이 없었다. 엄마가 자기를 부러워한다니 어떤 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렸던 것 같다. 아니면 어른인 엄마가 고작 책상을 부러워한다는 게 뜬금없었을까? 댕그래진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딸에게 다시 말했다    


- “진짜 좋겠다. 축하해”    


딸은 그제야 생긋 웃었다.     


‘넌 좋은 부모를 만난 덕에 어린 나이에 너만의 책상을 가지게 된 거야’라는 생색이 아니라 진심에서 나온 축하였다.


딸은 6살 무렵부터 ‘나는 형님이야’, ‘나는 언니야’라는 말을 종종 하곤 했다. 7살이 돼서는 양치질, 샤워, 화장실 뒤처리, 어른 젓가락 사용, 점퍼 지퍼 채우기 등 할 수 있는 게 늘어난 데다 유치원에서 가장 높은 연령이었기 때문에 언니부심이 최고조에 달했다.

하지만 딸에게 초등학생이라는 존재는 쉽게 넘볼 수 없는 다른 레벨이었다. 딸에 눈에 비친 초등학생 언니, 오빠들은 혼자서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 먹고 혼자서 학원차를 타고 학원을 다니는가 하면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거나 공놀이를 한다. 엄마, 아빠 없이 말이다. 오늘 아침 유치원 가는 길에도 딸이 초등학교 3학년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를 보고 내게 소곤거렸다.

     

- “엄마 저 언니 좀 봐, 혼자 슈퍼에 간다.”      


이제 2주만 지나면 그렇게 동경하던 초등학생이 된다니 아이에게 입학이 얼마나 큰 사건일까. 초등학생이 된다는 생각을 하면 배꼽이 간지럽게 기분이 좋다가도 아직 시계 보는 것도 서툴고 돈 계산도 잘 못하는 자신이 걱정되다가 이내 잘할 수 있을 거라는 다짐을 하지 않을까. 과거에 내가 그랬던 것 처럼 말이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세로보다 가로가 긴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다녔다. 색깔은 빨강과 흰색이 섞였고 버클을 열고 뚜껑을 여는 구조였다. 책상 역할은 앉은뱅이 접이식 밥상이 대신해줬다. 어머니께서 들려주시는 이야기로는 나는 참 야물딱진 1학년이었다고 한다. 자기 전에 다음날 학교에 가져갈 책과 준비물을 잘 챙겨놔서 따로 도와줄 일이 없었다고 하셨다. 초등학교 입학 전 겨울에는 아직 한글을 다 모르는데 어떻게 학교를 가냐며 웅변학원에 보내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딸을 키우다 보면 딸의 모습에서 어린시절을 나를 만날 때가 많다. 특히 아이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 어린 시절의 내가 어느샌가 나타나 함께 기뻐하곤 한다. 솔직히 딸은 과거의 나보다 한글도 더 많이 알고 더 예쁜 책가방과 멋진 책상을 가졌으니 좀 부럽기는 하다.


책상 구입 이틀 후인 주말 아침, 남편과 나는 식탁에 마주 앉았다. 새로 구입한 책상을 어디 놓을지를 두고 심각한 회의가 열렸다. 줄자를 들고 이리저리 치수를 재고 노트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두 시간 가까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평소 관심도 없던 풍수지리에 따른 좋은 책상 위치를 검색해 보는가 하면 전등과의 거리를 계산하고 인테리어와 아이의 동선까지 따지는 서로를 보며 남편과 나는 여러 번 박장대소를 했다. 그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렇게 외쳤다.    


- “굳이 이렇게 까지 해야 해?”    

- "그러니까 말이야, 내 말이!"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우리는 책상의 위치를 마침내 정했다. 방의 가장 안쪽 창가로 말이다. 우리 집에서 가장 조용할 테니 아늑하고 집중하기에도 좋을 거다. 나중에 고학년에 돼서 책상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졌을 때 딴짓하다가 공부하는 척하기도 좋고 꾸벅꾸벅 졸다가도 안 그런 척하기도 쉬운 자리다. 아이가 책상 앞에 앉아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저 멀리 커다란 산이 보인다.

풍수지리는  모르겠고 그 산을 바라보면서 공상이나 실컷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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