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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 살 선생님 Oct 23. 2021

육아성 치매증

육아가  밀어내는 기억들

"알콜성 치매증"

주말마다 온 가족이 모여 시청하는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시어머니가 걸린 병이다. 현관의 비밀번호가 갑자기 생각나지 않아 울고 있는 시어머니를 보며 우리 모두 안타까워 마음이 저렸다.


사실 나에게도 이런 병이 있다.

바로 "육아성 치매증"


나는 어쩌면 처음부터 기억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가끔 여동생이 가족모임에서 꺼내오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이 나의 기억 속에는 없었다. 디테일하게 내가 했던 말까지 토시 하나 빠뜨리지 않고 읊조리며 어떻게 자신이 한 말을 잊을 수가 있냐는 여동생의 엄청난 기억력에 그저 혀를 내두르기만 했다.


그래도 의지를 가지고 기억하는 것은 자신 있었다. 학창시절 시험기간에 외우는 것은 곧잘 했었다. 20년이 지난 일이라 아득하지만, 나는 학창시절 공부를 꽤나 잘했다. 엄청난 포토메모리 능력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봤다, 그리고 이걸 기억해야겠다.' 하는 의지를 가지면 잘 기억했다. 적어도 현관문을 열어 놓고 집을 나서는 일 같은 건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다.

나는 현관문을 열어놓고 집을 나섰다. 그것도 1박 2일 동안 말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친정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처갓집 좋아하는 우리 남편도 한 몫했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함께 저녁을 먹고 하룻밤 잔 뒤 다음날 아침이었다.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 아파트 관리실 직원분의 전화였다.


"네, 안녕하세요. 혹시 집에 계시나요?

다름이 아니라 옆집에서 어제저녁부터 현관문이 계속 열려있다고 해서 여쭤봅니다."


부랴부랴 문을 좀 닫아주십사 부탁드리고 전화를 끊으니 헛웃음이 났다.

도둑이 들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아니다 도둑이 이미 다녀갔을 수도 있겠다. 결혼반지가 그대로 잘 있나 확인해야지. 방문도 아니고, 창문도 아니고 현관문을 열어두고 집을 떠나다니. 별의별 생각을 다 했던 것 같다.


정수기의 물이 싱크대를 넘친 것은 남편과 나 모두 다섯 번 이상은 되는 듯하다.

정수기에 컵이나 냄비를 올려두고 물을 틀어둔다. 아이가 "엄마" 하고 부르면 까맣게 잊어버리기를 여러 번. 싱크대를 차고 넘쳐 바닥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면, 생각한다.


'아차, 또 바닥 가득 물이 흐르는구나.

흘러넘친 물을 닦으며 또 헛웃음을 웃는다. 무엇이 나를 이토록 기억하지 못하게 만들었나.


아이를 키우는 것이 누구에게나 이런 '육아성 치매증'을 선물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나처럼 무엇이든 내가 직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그리고 꼼꼼함을 넘어 약간의 완벽주의인 사람이라면 '육아성 치매증'에 걸린 확률은 높다.


너무나 알아봐야 할 것이 많았다.

아이가 계속 자라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바꿔야 하는 것들이 있다. 옷가지나 기저귀 같은 것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음악으로 치면 그냥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반주 같은 것이다.


시기에 따라 필요한 장난감은 얼마나 많은지.

요즘과 같은 시대에 중심을 잡지 않으면 수많은 정보 속에서 허우적대기 일쑤다. 검색만 하면 '이렇게 키워야 한다.' '이걸 써보니 너무 좋더라.' '이런 건 절대로 하면 안 된다.' 같은 류의 글들이 무수히 나열된다.

예전 같으면 돌멩이가 장난감이요. 엄마가 정리하는 빨래나 살림살이가 장난감이었겠지.

'O개월 아기 장난감' 하고 검색하면 수백 개의 장난감이 나온다. 찾아보니 재미있어 보이고 아이도 잘 가지고 논다. 더 열심히 정보를 모으고 모아 가장 재미있는 장난감을 준비하고 싶은 것이다.


이유식은 또 얼마나 단계가 많고 기구는 각양각색이다. 요리를 즐겨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유식 만드는 일도 하나의 거대한 프로젝트다.


게다가 아이가 넘어져 다치기라도 하면, 혹은 감기에 걸려 일주일 정도 고생하기라도 하면 마음은 왜 그리 무거운지. 내가 무언가 잘못한 것 같은 느낌에 잠을 이루지 못하던 날이었다.


이런 많은 것들이 나의 기억을 밀어내는 것이다.

하나씩 잊어야 아이로 인한 많은 것들을 채울 수 있어서 사소한 기억을 버리는 쪽을 택한 것이다.


다행히 육아성 치매증의 치료법은 존재한다.

완벽하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조금은 실수할 수 있다. 가장 좋은 것을 주지 못하더라도 아이는 생각보다 잘 자란다.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응원하며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완벽한 엄마가 되어주지 못해도 괜찮다.


완벽하고 싶거나 무거운 마음이 들 때 마음을 가볍게 하는 간단한 생각만으로도 육아성 치매증은 치료되기 시작할 것이며 엄마의 무게보다는 행복을 더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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