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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 살 선생님 Oct 24. 2021

일하는 엄마의 놀이터 적응기

우리의 여름은 뜨겁고 따뜻했다

여느 때처럼 하원하는 길에 선생님과 이야기를 조금 나누고 있었다.

오늘 있었던 일, 내일 준비물 이런 것들.


갑자기 같은 반 친구가 현관에서 쏙 나오더니 우리 아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 놀이터 가자!"

"그래 좋아!"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아이 둘은 손을 잡고 어린이집 정문 반대편에 있는 놀이터로 달려가버렸다. 선생님과 하던 이야기를 급하게 그만두고 인사도 겨우 드리고 따라 달렸다. 네 살 아이들이 달리기는 얼마나 빠르던지. 그리고 놀이터에서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 노란 체육복(마침 체육복을 입고 등원해야 하는 날이었다.) 입은 어린이들이 열댓 명, 그리고 엄마 열댓 명이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다. 마치 처음 보는 세계를 본 듯했다.


그 전까진 5시쯤 어린이집에서 하원 하면 남편과 나, 아이 이렇게 셋이서 저녁시간을 보냈다. 마트에 가기도 하고, 친정에 가기도 하고, 가끔 조금 부지런을 떨어 놀이동산에 가기도 했다. 항상 오늘 어린이집 마치면 뭘 하고 놀아야 하지 고민했지, 놀이터에 가서 놀아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다. 더군다나 우리가 사는 아파트 어린이집이 아니라 얼른 차를 타고 돌아오기 급급했다. 


출퇴근하는 시각에 맞춰 등하원을 하느라 같은 반 친구들과 거의 마주치지 못한 것도 한 몫했다. 간혹 휴가 때 아이를 9시 30분쯤 어린이집에 데려가면 줄줄이 늘어선 등원 줄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게다가 5시쯤 아이를 데리러 가면 신발장의 신발은 몇 개 남아있지 않은 상황. 항상 빈 어린이집에 등원하고 아이들이 거의 다 빠지고 없는 시각에 하원하는 우리아이였다.


가끔 우리가 사는 아파트 놀이터에 가면 늘 낯선 형과 누나들 뿐. 형 좋아하는 아이가 따라다니면서 인사를 하고, 축구하는 형들 사이에 끼이고 싶어 기웃거려도 네 살 조그만 어린애를 끼워줄 리가 없다. 가끔 어린아이 돌보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다정다감한 형을 만나면 너무 고맙게도 신나는 하루를 보내던 게 전부였다. 아이는 놀이터에서 함께 놀 친구나 형이 필요했다. 


그런데 놀이터에서 같은 반 친구들이라니!

이날 이 후로 아이는 곧바로 집에 가는 일이 없었다. 가끔 비라도 오면 마지못해 집으로 갈 뿐.

보슬보슬 내리는 비 정도는 가볍게 무시하고 놀았다. 여름에 해가 길 때는 8시도 가뿐히 넘겼다.

아이들은 땀범벅이 되어 놀고, 모여 앉아 간식을 먹고, 물총놀이를 하기도 한다.


엄마들은 모여서 이야기를 한다. 

"내년에 유치원 어디 보내세요?"

"아이 목 아프면 이거 먹여보세요."

"낚시 장난감 사줬더니 정말 잘 가지고 놀던데요?"

"우리 애가 무슨 노래를 부르던데 아무리 들어봐도 잘 모르겠어요."

"아! 그거 무당벌레 노래예요, 인터넷에 찾아보면 나오더라고요."


나는 새로운 사람과 친해지고 마음을 여는 데 오래 걸리는 성격이다. MBTI 검사를 하면 열에 여덟, 아홉은 INTJ. 

- 독립적이며 사람보다는 사물에 관심이 많고 사람과 친해지기 위해 크게 노력하지 않는다. 

사람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는 부분을 읽으며 처음에는 너무 극단적이라며 웃어넘겼지만 어느 정도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조리원에서도 흔히 말하는 "조리원 동기"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밥을 먹고, 아기와 모자동실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잠을 자거나 쉬었다. 갖가지 교육은 불필요하게 느껴졌고, 가끔 밥을 먹다가 사람들과 마주치거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도 적당히 이야기가 길어지면 웃으며 마무리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2주가 지나면 각자 자리로 돌아가게 될 사람들인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던 것 같다. 


아무튼 이런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같은 반 엄마들과 매일 세 시간씩 이야기를 하며 앉아서 커피도 마시고, 집에 놀러 가기도 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단지 우리 아이와 같은 반 아이의 엄마라는 이유로 마음이 와르르 열렸다. 처음 친구의 집에서 놀다 온 날, 나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아는 남편은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제 알고 지낸 지 일주일 된 집에서 놀다가 왔다고?"


이제는 추운 가을이 되어 어두움이 금방 찾아오고 날씨도 많이 추워져 아이들의 놀이터 열정도 한풀 꺾였지만

우리의 이번 여름은 정말 뜨겁고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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