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은 언제나 잠정적이고 불완전하다. 오늘의 확신은 내일의 헛소리다. 그게 무엇인지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그것을 어떻게 보는지뿐이다.
-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p.119 -
이 새벽, 나는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중이다. 노란빛의 조명은 고흐의 해바라기를 떠오르게 하고 원목 가구와 패브릭 소파는 아늑한 분위기를 만든다. 나는 읽고 쓰기 위해 푹신한 소파가 아닌 그보다 딱딱한 의자를 골라 앉았다. 출근 전 잠깐의 여유를 즐기는 직장인들 사이에 1/2 직장인인 나도 있다.
자, 내가 묘사한 이것은 진실인가?
나는 7시에 이 까페에 도착했다. 7시가 새벽인가? 입춘은 지났으나, 아직 일출시간이 7시 이후니 새벽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6시 반이면 해가 뜨는 시기에 7시는 아침이다. 보통의 직장인, 학생에게도 7시는 새벽이라기 보다는 아침에 가깝다.
정말 이 조명은 노란빛일까? 황금빛, 주황빛은아닌가?
이 공간은 정말 아늑한가? 내가 읽고 쓰는 이 순간은 분명 아늑하나, 내가 지금 영업을 위해 고객과 만난다면 다를 수도 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직장인일까? 학생, 취준생, 친구를 만나러 온 주부일 수도 있지 않은가?
내가 말하고 쓰는 이 순간, 내가 보는 것은 내가 표현해 내는 것이다. 내가 보고 해석한 이미지! 같은 장소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더라도 서로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 움직이지 않는 풍경에 대한 해석이 이러한데, 사람은 어떠하겠는가? 움직이고 변해가는 사람을, 특정 시점에 특정 형태로 만나 내가 해석한 이미지로 판단한다는 것은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사람이 이러한데 인공지능이나 기술은 어떠할까? 계속 진화해 나가는 그것을 내가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공부하고 지식을 쌓는 것은 제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다. 시선의 높이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일이다. 있는 그대로 보고, 현상을 이해하고, 더 높은 시선으로 그 현상을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고, 그 모든 것을 포함한 과거와 현재, 미래로의 흐름을 이해하는 능력!
내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지식이 아니다. 나의 해석과 아이들의 해석은 다르다. 내가 살아온 세상과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다르다. 아이들이 생각하도록, 생각하는 힘을 키울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일! 내가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 외에 해야 할 역할이 있다면 이것뿐이리라. 스스로를 믿고 사랑하며 질문하고 생각하는 힘을 기를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 나부터 그렇게 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