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히 이어진 책 읽기
1.
해외생활 초기에 거주했던 북아일랜드는
한국과 관련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었으니.
차로 한 시간은 걸려 가야 하는
중국식 아시안 마트에서
부족한 대로 쌀을 비롯한 식재료 쇼핑을 하고
가끔은 중국 식당에서 외식을 했다.
일식 요리나 재료는 너무도 값이 비쌌기에
당시 쉽게 먹을 수는 없었다.
(남편이 출장 때마다 암스테르담 공항서 환승하며
거기서 사들고 오는 각종 초밥세트가
그렇게 반갑고 맛있었던 기억이다)
다른 사모님들을 보면
제철 야채와 육류, 수산물 등
현지 재료를 십분 활용하여
각종 김치와 무침을 창의적으로 개발하셨고
집마다 있는 오븐을 활용하여
각종 빵과 케이크, 디저트를 만들어 내셨다.
요리 쪽으로 전혀 재주가 없었던 새댁인 나마저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맞춰서 살았던 때였으나.
그래도 한국산 이란 이름이 붙으면
뭐든 반갑고 귀하고 서로 나누곤 했다.
최근 웬만한 음식들, 화장품, 각종 문화가
한국을 상징하는 K로 명명되며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다는 게
참으로 신기하기만 할 따름이다.
2.
당시 현지 공장으로 선편 운송하는
회사 컨테이너의 한쪽 공간을 이용해
파견된 각 직원 가정마다
일정 금액 한도 안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전달해 주는
이른바 ‘부식 제도’가 분기별로 실시되었다.
신청하고 한두 달 정도 있으면
남편이 한아름 박스를 싣고 퇴근할 때가
아주 반가운 선물의 도착이었다.
장기간 보관 가능한 각종 양념류, 라면에
술안주나 아이들 과자 등등.
다른 회사에는 없는 제도였기에
마냥 우리 회사를 부러워했다.
어린 아가를 키우는 단촐한 세 식구였기에
상대적으로 넉넉한 양의 재료들을 주문해서
싱글로 와있는 총각 직원들과도 나누기도 하고
음식으로 만들어 집으로 종종 초대하기도 했다.
3.
회사가 성장하고 여러 법인이 신규로 생겨나며
더 많은 직원들을 대륙마다 파견하고
형평성 차원에서 부식 제도를 확대하게 되었는데.
예를 들어 런던 같은 대도시에는
쉽게 이용 가능한 한인마트들이 있어서
굳이 몇 달 걸려 받는 식재료를 신청할 필요가 없었다.
그 대신 도서나 CD를 신청하면 보내주는 것으로
제도가 약간 유동적으로 운영되었으니.
대부분의 가정들이 아이들 중심으로
한글로 된 아동용 도서나 참고서 등을 주문할 때
우리 집은 내 위주로 읽고 싶은 한글 책들을 주문했다.
교보문고 사이트에 들어가
읽고 싶은 책들을 고르고 골라
책제목과 출판사, 가격을 엑셀 파일에 채워 넣어
담당자에게 이메일로 회신해 보냈다.
허영만 님의 <식객>이나
박경리 님의 <토지>, 만화 <슬램덩크> 등등.
직접 서점에 방문하여 책을 고르는 기쁨은 없었으나
그때그때 읽고 싶은 책들을 구할 수 있었기에
약간의 문화적 갈증 해소에 도움이 되었던 기억이다.
4.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소속 회사도 변경되어
복지 혜택을 책으로 누릴 기회는
저만치 추억 속으로 사라져 갔고
노안으로 인한 시력 저하로
한동안 책을 멀리 했던 시기도 있다.
남가주에서 북가주로 이사 오면서
웬만한 책들을 지역 도서관에다 기증했기에
현재 책장에는 일부의 책들만 소장하고 있다.
대신 <리디>나 <밀리의 서재> 같은
전자책 앱들도 여럿 생겨났기에
시도는 해보고 있지만 영 익숙해지진 않는 중에
가끔씩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보급품을 신나게 받아드는 꿈을 꾸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