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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나의 20년을 꿈꾸며

2018/09/26 발표

by 고요한밤

1.

시간을 거슬러 2018년 초를 떠올려 본다.

남편 일 관련 남캘리 얼바인에서

북캘리 베이 지역 산호세로 이사가 결정되고,

살 곳을 후다닥 정하고

이사 관련 많은 것들을 체크하고

스케줄 짜느라 바쁘던 중에,

나의 마음 한켠으로

이제 나 자신의 앞날을 위해

무언가 할 일을 찾아야 한다는

속칭 거룩한 부담이 자리했다.

그동안 어찌 됐든 아들 넘 하나 키워

타주 대학으로 보내놨으니

학군이나 학교, 교육 등에 얽매일 건수도 더 이상 없고,

낯선 곳 빈둥지에서 부부 둘이서

마주 보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할 것만 같고,

새로운 사람들을 새롭게 알아가며

보람 있게 여유 시간을 보내야 할 것만 같았다.

밤마다 인터넷으로 산호세 관련 서치를

눈 빠지게 해대던 중에 눈에 들어온 한 단체가 있었다.

다양한 이유로 미국 이주 후

경력단절을 겪는 한인여성들을 위한

재취업 지원 활동을 한다고 내세운 신생 단체였다.


2.

학교에 있으면서 조교 시절을 거쳐

졸업 전 바로 결혼하고 출산하고

해외를 돌게 된지라 취업의 경험이 전무하고,

그렇다고 내가 돈을 직접 벌어보지 못한

평범하기 짝이 없는 찐 전업주부로서의 삶이었기에,

나보다는 연배가 어린 동생 뻘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내 나이 돼서 후회한다 “

강조하고 싶었던 걸까?

이사 준비 중이던 2월 중

얼바인서 비행기를 타고 산호세에 날아와

커피챗 타임에 참석하면서

그 인연이 시작되었고,

이사 온 이후에도 연결고리를 유지하게 되었다.

신생 단체로 인지도 높이기를 고민하던 대표를 도와

여러 잡다한 일을 분담하고 의논하고,

행사장에서는 입구 문을 열고 안내하는 일부터

커피 픽업, 다과 세팅, 도네이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소소한 도움이 되고자 했던 것 같다.

당시 내 기억으로는.

그야말로 Volunteer로.


3.

1-2년 사이 조직이 커지고

나름 베이 지역에 알려지면서

더 유능하고 더 경험 많은 젊은 친구들이

새 운영진으로 합류하고

아이디어를 모아가고 새로운 이벤트를 만들고

재취업 성공 사례가 하나둘씩 늘어가게 되었던 때.

코비드가 조금씩 시작되던

2020년 2월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운영진 중 한두 명과 앉아 몇 가지 얘기를 하다가

새로운 이벤트를 기획한다고 그녀가 말을 꺼냈다.

랜선으로 연결해 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 동안 뭔가 자기 할 일을

묵묵히 집중해서 한다는 내용이었고,

그 이름을 ‘존버 프로젝트’라고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바로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인터넷 검색만 바로 해봐도

무슨 말에서 나왔는지 아는 단어인데,

다양한 나이 대의 여성 그룹의 격과 안 맞아

공식적으론 부적합하다고 했으며

무엇보다 그녀가 미국 명문대 석박사 출신이므로

학위논문을 썼다라면

어휘 선택과 표현의 중요성에 대해선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잘 알거라 생각했기에.

대체 명칭을 준비하겠거니 추가 언급을 하진 않았다.

며칠 후 온라인 운영진 회의에서

그녀는 그대로 ‘존버 프로젝트’를 공식화했고,

“그 이벤트 취지에 맞는 요새 많이들 쓰는 말”이라니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좋다 하며 다 찬성을 표시했다.


4.

보기보다 욱 하는 성향을 지닌

나는 바로 반대의 뜻을 밝혔다.

나조차 굳이 안 쓰는 비속어에서 온 단어에,

주말에 분명히 다른 단어를 찾아보라 권유한

내 의견이 깡그리 무시됐음과,

나 하나 빼고는 모두 용인하는 당혹스러움 등등.

작심하고 운영진 대화방에서

강하게 거부 의사를 전했다.

존버가 그렇게 쓰일 수 있으면

존맛탱 이런 단어도 얼마든지 사용 가능한 거 아니냐.

애들도 인터넷 검색만 해봐도 알 수 있는 단어를

엄마들 모임서 격 떨어지게 굳이 써야 하나.

당시 몇 살 차로 최연장자였던 내가 한 개인에게

감정적으로 쎄게 들이받았다고 여긴 건지.

이후 대표의 결정으로 그 단어는 제외하기로 했지만,

나에 대해 껄끄러워하는 기색이 보이기 시작했고,

조금씩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되었다.


5.

그 결심을 제대로 실행할 때가 다가왔고,

켜켜이 쌓인 2년간의 시간들을

도려내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고 쉬웠다.

클릭 몇 번만으로도 나는 다시

‘소속되지 않은 일개 자연인’으로 다시 복귀했다.

그런 면에서 구글은 참 잘되어있음을 인정한다

이것이 내 산호세 첫 프로젝트의 깔끔한 종말이었고,

이후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영역의 탐구에 들어가

다른 방향으로 고민을 새로이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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