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여행 첫날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서점이었다. 내셔널갤러리 입장을 12시로 예약해놓아 동선을 맞추다 보니 서점이 첫 번째 목적지가 됐다. 나는 여행할 때 그 지역의 미술관, 서점, 도서관, 대학교, 공연장을 방문하는 것을 즐긴다. 특히 영국에는 가고 싶은 서점이 많았다. 워터스톤스, 포일스, 던트북스, 런던리뷰북샵, 노팅힐 서점 등등. 그중에서도 영국 전역에 수백 개의 지점을 가진 ‘워터스톤스’를 꼭 가고 싶었다. 왠지 그곳이 가장 영국다운 서점일 것 같았다.
워터스톤스에 도착하자마자 서점 입구에서 사진을 찍었다. 마침 아빠와 손을 잡고 길을 지나가던 한 꼬마가 진열장에 놓인 페파피그 책을 가리키며 무척 반가워하며 좋아했다. 한국의 뽀로로처럼 영국에서는 페파피그가 아이들의 엄청난 사랑을 받는다고 한다. 우리 아이도 대여섯 살 때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페파피그 DVD를 무한반복으로 봤던 터라 미소가 지어졌다.
서점은 넓었지만 아늑함이 느껴졌고 단정하고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 둘러보기 좋았다. 중앙 매대에는 제인 오스틴, 찰스 디킨스, 버지니아 울프 등 영국을 대표 작가들의 책이 쭉 놓여 있었다. 특히 펭귄 출판사 책들은 고급스러운 컬러의 패브릭 커버에 정교하고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끌었다. 나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몇 번이나 손에 들었다 놓았다. 여행 중에 들고 다니기엔 무거울 것 같아 결국 내려놨지만 지금은 그때 사오지 않은 것이 아쉽기만 하다.
영국에 오기 전 나는 영국 출신 작가 앨리 스미스의 <여름>을 읽었다. 지금 이 시대의 영국 현실과 삶의 모습을 잘 담고 있는 책이었다. 영국에 가면 현지 서점에서 앨리 스미스의 책을 한 권 사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위시리스트에 적어뒀었다.
그런데 서점에 앨리 스미스의 책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라고 불린다는 그녀의 책이 없을 리 없다. 직원에게 문의하니 ‘S’ 섹션으로 가면 된다고 했다. 나는 당연히 앨리 스미스니까 ‘A’ 책장에 있겠거니 했는데 성(last name)으로 찾았어야 했다.
워터스톤스는 앨리 스미스의 책을 여러 권 보유하고 있었다. 그중 나는 계절 시리즈 후속편인 최신작 <Companion piece>를 골랐다. 솔직히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자신은 없다. 열 장도 읽지 못하고 덮어버릴 가능성이 크다. 그래도 산다. 읽고 싶은 마음보다 소장하고 싶은 욕구가 더 큰 나다.
앨리 스미스의 책을 살펴보다가 같은 책장의 아래 칸에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책도 발견했다. 내게 어떤 작가를 좋아하냐고 물으면 두 명의 작가를 꼽는데 그중 한 사람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다(다른 한 사람은 김연수 작가다). 이렇게 내 최애 작가의 책을 영국 서점에서 마주하다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미 집에 <다시, 올리브>를 리커버 버전까지 소장하고 있지만 올리브답게 살고, 그녀처럼 나이 들고 싶다는 마음에 <Again, Olive>를 집어 들었다. 내가 한 손에는 앨리 스미스 책을, 다른 한 손에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책을 들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좋아하자 남편은 자기가 사주겠다며 계산을 했다.
아이도 한참을 서성이다 여러 권의 책을 골라왔다. 나는 두 권만 사자고 했다. 무겁기도 하거니와 적당히 사야 더 확실히 잘 읽어서다. 아이는 고민 끝에 그래픽 노블 <GUTS>와 데이비드 윌리엄스의 <Robodog>를 선택했다. 5학년인 아이는 이번에 여행에 공부할 거리는 전혀 가져오지 않고 읽을 책 몇 권만 챙겨왔다. 여행 가방을 쌀 때 수학 문제집을 넣으려 했지만 그만두었다. 대신 매일 일기를 쓰고, 책을 읽자고 했다.
우리는 서점 내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방금 산 책을 40분 정도 읽었다. 사실 난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아 몇 페이지 못 읽었다. 그래도 차분하고 잔잔한 서점 분위기 속에서 편안히 담소를 나누고 책 읽는 영국인의 일상을 경험해볼 수 있어 좋았다. 자신이 고른 책을 마음에 들어하며 책에 푹 빠져 읽는 아이를 바라보는 것도 흐뭇했다. 이날 내셔널갤러리, 트라팔가 광장, 빅벤 등 여러 명소를 다녔는데 가장 좋았던 건 서점이다. 수많은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장소보다 서점에서 보낸 여유로운 시간이 나를 더 충만하게 해주었다.
다른 아이들은 하루에 몇 시간씩 수학 선행을 할 테지만, 내 아이는 10일 내내 문제 하나 풀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는 여행 첫날 서점에서 산 책을 여행 기간 동안 재밌게 다 읽었다. 그거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