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여행을 하며 오길 정말 잘했다 생각이 든 장소가 있다. 바로 ‘켄우드 하우스’다. 여긴 영국박물관, 빅벤, 런던탑처럼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장소는 아니다. 이곳은 런더너들에게 인기 있는 나들이 장소다. 영국 여행을 앞둔 사람이 있다면 이곳을 가장 추천해주고 싶다. 나는 켄우드 하우스에 가고 싶어 영국에 또 가고 싶다.
전원경의 <예술가의 거리>라는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이곳은 17세기 대저택으로 햄스테드 히스라는 부촌에 위치해 있다(손흥민이 이 동네에 살고 있다고 한다). 넓고 푸른 잔디밭, 울창한 숲, 고요한 호수가 있으며, 저택 안에는 베르메르, 렘브란트, 터너 같은 유명 화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공원과 미술관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영화 ‘노팅힐’에도 등장한다.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영화라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영화 속에서 줄리아 로버츠와 휴 그랜트는 사랑이 이루어질 듯하다 어긋나고, 시간이 흐른 뒤 재회하는데 그 장소가 여기다. 줄리아 로버츠는 이곳에서 헨리 제임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촬영하고 있었다. 그녀는 휴 그랜트가 자신에게 영국의 작가 제인 오스틴이나 헨리 제임스의 작품을 권했던 걸 잊지 않고 있었다. 둘은 이곳에서도 오해로 멀어지지만, 사랑의 모먼트가 담겨 있어 나는 이 장면을 좋아한다.
축구장 두세 배 크기는 되어보이는 잔디밭에서 사람들은 드문드문 앉아 책을 읽거나, 수다를 떨거나, 햇볕을 받으며 낮잠을 잤다. 또한 축구, 크리켓, 배드민턴 등 다양한 운동을 즐기기도 했다. 곳곳에서 축구 하는 이들을 지켜봤는데 다들 공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축구 종주국답게 영국은 일반인들도 축구 실력이 수준급인 듯했다.
우리는 나무 그늘 아래에 자리를 잡고 책을 좀 읽은 후 저택 내부의 미술관을 관람했다. 원래 집이었던 미술관은 일반 미술관과는 달리 초대를 받아 멋진 집을 둘러보는 기분이 들게 했다. 벽마다 작품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나는 그중 베르메르의 <기타 연주자>를 볼 수 있어 무척 기뻤다. 베르메르의 작품 수는 전 세계 35점밖에 되지 않아 그의 작품을 직접 보기란 쉽지 않다. 이 작품은 여성이 기타를 연주하는 모습으로 작품 안에 내가 좋아하는 책, 악기, 그림이 모두 담겨 있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렘브란트가 말년에 그린 <두 개의 원이 있는 자화상>도 있었다. 아이는 이 작품을 먼저 발견하고 나를 불러 엄마가 좋아하는 화가 그림이 여기 있다고 알려줬다. 아이와 어렸을 때부터 미술관을 참 많이 다녔는데 이제는 엄마의 그림 취향까지 파악할 정도가 됐다.
저택에서 특히 마음에 든 공간은 서재였다. 돔 형식 천장에 전체적으로 파스텔톤 민트와 핑크로 꾸며져 있어 사랑스러우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걸 보니 영국 웨지우드 퀸즈웨어 시리즈가 떠올랐다. 책장에는 고풍스러운 양장의 책들이 빼곡히 꽂혀있었고, 도서관 사다리도 있어 완벽한 서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서재에서 책을 읽는다면 얼마나 행복할지 상상만으로도 벅차다. 수백 권의 책도 이곳에서는 거뜬히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미술관 관람 후 다시 잔디밭으로 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신발을 벗고 돗자리에 앉아만 있어도 좋았다. 그런데 아이는 축구를 하고 싶어 몸이 달았다. 평소 매일 축구를 할 정도로 스포츠를 좋아하는 아이는 공이 없어 아쉬워했다. 직원에게도 문의해봤으나 공은 팔지 않았다. 방법이 없으니 공 있는 친구에게 가서 같이 축구 하자고 말해보라고 했다. 아이는 거절당하면 무안할 것 같다며 선뜻 다가가지 못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던지 용기를 냈다.
영국 친구는 아이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두 아이는 공을 주고받으며 재밌게 놀았고, 그러다 그 친구의 친구들 가족이 몇 팀 더 와서 여러 명이 합세했다. 잠시 후 다른 곳에서 축구하던 아이들까지 추가로 합세해 판이 커졌다. 아이는 그렇게 처음 만난 친구들과 켄우드 하우스 잔디밭 한복판에서 1시간 넘게 축구를 했다.
아이는 영국 친구들과 게임을 해보니 그들은 실력도 좋고, 축구를 진심으로 한다는 걸 느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의 첫 A매치!”라며 만족스러워했다. 아이는 영국에서 이때가 제일 즐거웠다고 한다.
우리는 켄우드 하우스에서 오후 내내 머물며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 양쪽으로 숲이 우거진 햄스테드 히스의 길을 빠져나오며 한국에 돌아가면 이곳이 무척 많이 생각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오늘 하루를 수없이 떠올리며 ‘그때 참 좋았지?’라고 말하는 우리의 모습이 그려졌다. 남편은 “오늘 너무 좋았다. 다음엔 우리 공을 꼭 챙겨오자!”라며 곧 다시 올 것처럼 말했다. 나는 그 말이 마냥 기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