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상드르 캉토로프의 피아노 리사이틀에 다녀왔다. 이번 달 이천에서는 <2024 이천국제음악회>가 열리고 있는데 여러 프로그램 중 프랑스의 젊은 피아니스트인 알렉상드르 캉토로프의 연주회가 포함되어 있다. 그는 2024 파리 올림픽 개회식에서 센강을 배경으로 라벨의 <물의 유희>를 빗속에서 연주한 피아니스트다.
그의 연주회에 가고 싶었던 건 사람들의 연주 후기를 읽고 나서다. 이전 공연에 다녀온 관객들은 모두 극찬을 했고, '프랑스의 임윤찬'이라는 표현까지 들려왔다. 게다가 연주 프로그램도 매력적이었다. 브람스의 광시곡,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 바흐/브람스의 왼손을 위한 샤콘느 등의 곡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연주 목록에서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자신감이 보였다.
며칠 전 안토니오 파파노 경이 이끄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유자왕의 협연을 다녀왔는데 그때 느낀 음악의 환희와 기쁨이 너무 짜릿해서 그 기분을 다시 경험하고 싶었다. 좋은 음악회가 주는 만족감이 다른 어떤 즐거움보다 크다. 내 삶의 질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걸 새삼 느꼈다. 이천까지 가는 일정이 다소 무리하게 느껴졌지만 그 행복감을 다시 느끼기 위해 연주회에 가기로 결심했다.
이천아트홀에는 1시간 넘게 걸려 도착했다. 이천에 오랜만에 가봤는데 많은 아파트와 높은 빌딩들이 생겨난 모습을 보고 놀랐다. 하이닉스의 유치로 인해 변화와 발전의 기운이 느껴졌다. 사실 소도시에서 국제음악회를 개최한다는 게 의외였다. 이천을 쌀과 도자기의 특산지로만 생각해왔는데 이번 공연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타공연장에 비해 티켓 가격이 매우 저렴했지망 좌석에 비어있는 자리가 많아 연주자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대로 걸어 나온 그는 정말 아름다웠다. 그는 티모시 샬라메를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데 정말 그랬다. 다만 원형 탈모가 심해 보였다. 예전에 한 피아니스트의 탈모가 진행되는 것을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연주자에게 탈모는 치명적이라 큰 스트레스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알렉상드르를 보니 문제될 게 없었다. 연주가 좋으니 탈모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의 연주 중 특히 리스트의 곡이 마음에 들었다.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제12번 ‘눈보라’를 들을 땐 슬픔의 감정이 휘몰아치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의 연주는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개인적으로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느껴지는 슬픔이 아니었다. 오히려 원초적이고 본연적인 슬픔의 감정을 건드리는 듯한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리스트의 <순례의 해> 중 첫 번째 해 ‘오베르망의 골짜기’라는 곡도 좋았다. 내가 앉은 자리는 피아니스트의 손을 잘 볼 수 있는 자리였는데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연주 중 허밍이 섞이기도 하고, 몰아쉬는 숨소리가 들리기도 하며, 자신의 호흡에 맞춰 음악 속으로 흘러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음악을 연주하면서 작곡가와 긴밀하고 강한 교감을 느끼는 듯했다. 피아노 치는 그의 모습은 마치 발레리노처럼 우아했다.
그러나 이 곡을 연주할 때 중간 박수가 두 번 나와서 흐름이 깨지는 이슈가 있었다. 좋은 연주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이후에도 그 관객이 또 박수를 칠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연주를 감상하게 되었다.
이번 공연에서 리스트의 곡을 들을 수 있어 더욱 기뻤다. 지난 달 독서 모임에서 리스트가 쓴 <내 친구 쇼팽>을 읽었다. 책에는 경쟁자였던 쇼팽에 대해 진정한 애정과 존경을 품고 있는 리스트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있었다. 글을 읽으며 그는 사색적이고 은유적인 음악가임을 알게 되었다. 그의 음악을 제대로 듣고 싶다는 열망이 커졌다. 알렉상드르의 훌륭한 연주 덕분에 리스트의 음악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간 것 같아 만족스럽다.
알렉상드르의 연주를 직접 듣고 나니 그는 보통의 피아니스트 이상의 존재라는 인상을 선명하게 받았다. 그의 연주에는 깊은 사유와 내적 탐구가 들어있었으며 음악을 통해 표현된 감정은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왔는지를 보여주었다. 스타급 연주자라면 자칫 거만해질 수 있는데 그의 에티튜드는 따뜻하고 순수했다. 자신의 음악을 들으러 와준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이 진심으로 느껴졌다.
그의 음악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감정의 깊이를 채우는’이라는 표현을 떠올린다. 풍부함을 넘어서 단편화된 감정을 자극하고 깊이 있는 연주로 삶의 폭을 넓혀주는 음악이었다. 오늘 예술의전당에서 그의 마지막 내한 공연이 열리는데 그의 연주를 또 듣고 싶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