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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 대화 나의 노래 Oct 30. 2024

시인이 건네준 연두의 시절 : 나희덕 시 낭독회

얼마 전 반달서림에서 열린 나희덕 시 낭독회에 다녀왔다. 나희덕 시인은 오래전부터 꼭 한번 만나보고 싶던 시인이다. 내가 좋아하고 따르는 선배들은 유독 그녀의 시를 열렬히 사랑하고 탐독하였다. 나희덕 시인에게 그토록 매료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실 그 답을 찾고 싶어 그녀의 시집 <가능주의자>를 사서 읽기도 했지만 기대만큼 큰 울림을 받지는 못했다. 이번 시 낭독회에서 시인의 진면목을 가까이에서 느끼며 그 답을 찾고 싶었다.

 

반달서림에 오면 늘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파트 상가 2층에 자리한 이 서점은 천장이 높고 다락방이 있으며 잔잔하게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작은 책방이다. 아파트 상가 특유의 정겹고 친근한 분위기가 있어 퇴근 후 이곳을 찾을 때면 어린 시절 방과 후 피아노 학원에 들르던 기분이 든다. 독서모임이나 낭독회, 때로는 음악회까지도 열리는 이곳에서 가을 한가운데를 지나가고 있는 토요일 오후, 나희덕 시인의 낭독회가 열렸다.

 

시인의 첫인상은 우리 큰엄마처럼 푸근하면서도 어딘가 단단한 인상을 풍겼다. 따뜻한 눈빛 속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분명함과 단호함이 엿보였다. 낭독회는 최근 출간된 시선집 <그러나 꽃보다도 적게 산 나여>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시집을 매만지며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전하고픈 마음으로 엮었다”고 말하는 시인의 첫마디에 내 마음도 서서히 열렸다.

 

시인은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자신의 생애를 차분히 들려주며 그 삶이 시 속에 어떻게 녹아들었는지를 이야기했다. 에덴 보육원에서 일하셨던 부모님 아래 공동체 속에서 자란 어린 시절, 윤동주의 시비 곁에서 부단히 시를 습작하던 대학 시절—이 시기의 시인은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리게 할 만큼 닮아 있었다. 또 획일화를 견디지 못해 3년마다 학교를 옮겨 다녔던 교사 생활 중에는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에서 근무하셨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순탄치 않았던 결혼 생활과 우연히 얻게 된 교수 자리까지, 마치 인간극장의 ‘나희덕’ 편을 보는 듯했다. 베일에 싸인 시인이 아니라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한 여성으로서 시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시인의 삶과 문학의 단단한 연결을 느끼며 그녀의 시가 마음 깊이 스며들었다.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 <사라진 손바닥> 등 시인의 젊은 날을 거쳐 갔던 시집과 그 안의 시들을 차례대로 소개해주었다. 그중에서도 내 마음에 남은 것은 <연두에 울다>라는 시였다. 그녀는 인생의 아주 힘든 시기를 지날 때 기차 창밖으로 석양에 빛나는 논밭을 보고 이 시를 썼다고 했다. 부부간의 갈등과 삶의 고비가 담긴 이 이야기를 시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 담담히 말했다.

 

그 시에서 “눈에 즙처럼 괴는 연두/ 그래, 저 빛에 나도 두고 온 게 있지/ 기차는 여름 들판 사이로 오후를 달린다”를 읽으며 나 역시 눈물이 고였다. 그 순간 내가 지나온 길과 그 길에서 느꼈던 감정이 시인의 말 속에서 되살아나는 듯했다. 어찌할 바를 몰라 힘겹게 버티다가 결국 그냥 흘려보내며 살아가던 시간들이 내게도 있었다.

 

그녀의 시와 이야기에는 직접적인 위로의 말이 담겨 있지는 않았지만 후배 여성들에 대한 애정과 응원이 느껴졌다. 그녀의 시를 사랑한다 말하던 이들은 인내의 시간을 견뎌내고 위로와 공감이 절실했던 여성들이었을 것이다. 낭독회가 끝나고 싸인을 받는 자리에서 내 앞에 있던 한 독자가 말했다. “선생님의 시를 읽으면 저는 왜 이렇게 눈물이 쏟아질까요.”

나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내 삶에 깊이 공감해주는 시인이 있다는 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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