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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 대화 나의 노래 Oct 31. 2024

바스, 제인 오스틴과 플라타너스가 속삭이는 곳

영국 여행을 준비하며 읽었던 서경식의 <나의 영국 인문 기행>에서 그는 영국의 아름다운 도시 바스(Bath)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예술적 시선과 삶에 대한 진한 그리움이 스며 있는 통찰을 좋아하는 나는 영국에 간다면 바스를 꼭 방문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스톤헨지, 바스를 포함한 현지 일일 투어 상품을 발견했다. 남편과 아이가 가고싶어하는 스톤헨지와 나의 버킷리스트인 바스를 모두 포함하는 일정이라 예약을 했다.

 

우리는 먼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스톤헨지에 도착했다. 스톤헨지는 기대했던 것보다 작았지만 4500년 전 인류가 문명의 도구 없이 거대한 돌들을 운반해 만든 유적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놀라웠다. 스톤헨지의 주요 석재로 쓰였다고 하는 블루스톤은 신성한 힘이 있다고 전해져 우리 가족은 그 돌 위에 손을 다같이 올려놓고 소원을 빌기도 했다. 스톤헨지 주변에는 유독 캠핑카들이 많았는데 별자리 관측을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라고 한다. 탁 트인 평지에 인공적인 불빛 하나 없이 오로지 별빛만 가득할 스톤헨지의 밤을 떠올려봤다. 고대인들이 느꼈을 우주가 조금 와닿았다.

 

드디어 바스에 도착했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온천수가 나오는 마을로 로마인들이 로마식 목욕탕을 지으면서 바스(bath)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도시 곳곳마다 사람들이 북적였지만 자연과 어우러진 풍경과 통일된 베이지 색감으로 건축물들이 이루어져서인지 차분함과 안락함이 느껴졌다. 영화 <레미제라블>을 촬영했다고 하는 플트니 다리(Pulteney Bridge)를 구경했다. 이 다리는 피렌체의 베키오 다리에 영감을 받아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어쩐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재작년 겨울 아이와 함께 피렌체에서 아르노 강 위에 떠있던 노란 빛깔의 베키오 다리를 봤던 게 떠올랐다. 전체적으로 바스는 이탈리아의 감성을 느끼게 해주는 도시였다.

 

바스의 또 다른 매력은 제인 오스틴 뮤지엄(Jane Austen Centre)이 있다는 점이었다. 제인 오스틴은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뽑힌다. 영국의 10파운드 지폐에는 그녀의 초상과 함께 ‘독서만한 즐거움은 없다’라는 <오만과 편견>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바스에 살았던 제인 오스틴은 <노생거 사원>과 <설득>이란 작품에서 이 도시를 배경으로 삼았다고 한다. 작가가 생활했던 곳이나 소설 속 배경을 여행하는 것은 특별한 기분을 준다. 문학과 여행이 교차할 때 두 세계 모두를 더 사랑하게 된다. 한국에서도 통영의 박경리 문학관, 봉평의 이효석 문학관, 서울의 윤동주 문학관을 찾아가곤 했다. 도시와 작가를 함께 기억하는 일은 정말 소중한 즐거움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는 제인 오스틴을 막연히 동경했을 뿐 그녀의 작품을 깊이 읽어보지 못했다. 바스의 제인 오스틴 뮤지엄은 아담한 규모였고 입장료는 약 3만원 정도였다. 전시 공간은 나중에 그녀의 작품을 모두 읽고 나서 관람하기로 마음먹고 이번에는 무료로 볼 수 있는 기념품샵만 둘러보기로 했다. 그곳에는 제인 오스틴과 그녀의 소설을 테마로 한 예쁘고 감성적인 기념품들이 많아 구매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그중에서 나는 차를 마시며 제인 오스틴의 책을 읽고 싶은 마음으로 <엠마>의 문장이 적힌 머그컵을 구매했다. 그 문구는 “A little tea if you please, sir, by and bye.”였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오자마자 나는 영화 <엠마>를 감상하고 제인 오스틴의 대표작인 <오만과 편견>을 펼쳤다. 엘리자베스의 높은 자존감과 당당한 모습, 그리고 다아시의 진실한 사랑에 깊이 매료되었다.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사랑의 힘을 일깨워 주었다. 이렇게 매혹적인 이야기를 왜 이제야 읽게 되었는지 조금 아쉬움이 스쳤다. 영국 여행 후 제인 오스틴의 문학 세계에 푹 빠져 현재는 <이성과 감성>을 주문해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조지안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인 로열 크레센트와 더 서커스에 가보았다. 크레센트는 반원, 서커스는 원 형태로 지어진 타운하우스로 둥글게 휘어진 독특한 건축 양식이 인상적이었다. 크레센트 앞에는 우거진 플라타너스와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어 우리는 그곳에 꽤 오래 머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잔디밭에서 타이머를 맞추고 다양한 포즈를 취하며 가족 사진을 찍었는데 그 즐거움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 장 두 장 찍을수록 자연스럽게 드러나던 우리의 표정은 그때의 기분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내가 혼자 사진을 찍으려 할 때 남편과 아들이 <곰돌이 푸>에 나오는 친구들처럼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사진에 깜짝 등장할 때는 정말 재밌고 사랑스러웠다.

 

더 서커스 주변의 벤치에 앉아 파란 하늘과 울창한 나무들을 바라보며 수다를 떨며 다음 여행을 구상하던 때가 기억에 남는다. 다음부터는 아예 한 캐리어를 식량 전용으로 정해 곰탕, 카레, 짜장 같은 레트로 식품들을 가득 채워가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이번 여행에서 비싸고 기대에 못 미친 영국 음식에 실망한 경험에서 나온 대책이었다. 여행 중 벌써 다음 여행을 계획하니 더 신이 나고 그 순간에 활기가 넘쳤다. 그 어느 곳보다도 영국의 나무 그늘과 잔디밭에서 우리는 가족이라는 유대감을 더 깊게 느꼈다.

 

나는 바스를 다시 찾고 싶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전부 읽고 그녀의 문학적 발자취가 남아 있는 이 도시를 진정으로 느껴보고 싶다. 바스의 아늑하고 고풍스런 골목을 구석구석 거닐다 우리 가족을 부드럽게 감싸주던 크레센트의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서 다시 한번 가족 사진을 찍고 싶다. 영국은 그 매력이 너무나도 커서 단순히 만족을 넘어 이 경험을 다시 만끽하고 싶게 만든다. 바스의 풍경과 기억은 다시 나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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