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각의 문턱에서 이완되는 마음
가족과 연락을 하지 않는다는 결심뒤에는 큰 고통과 불안정함이 만든 상처가 수면 위로 서서히 떠오른다. 이 시기를 아주 잘 들여다보면서 보내야 한다.
아무리 내가 살기 위해 결정한 일이라 하더라도 수십 년 동안 죄책감, 불안, 저주와 그녀의 악담 속에서 살아온 나는 극도로 불안정한 증상을 보였고 하루에 수십 번도 내가 정상인지 아닌지 스스로 묻고 또 묻는 행위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다행히 매번 이렇게 묻고 있다는 건 정상이란 뜻이었다.
10년 넘도록 실행한 명상, 마음 챙김, 운동 그리고 실생활에 습관처럼 자각하는 알아차림이 큰 도움이 되었다. 수행자라 해도 될 만큼 호찌민에서 나는 스스로 극복하고자, 있는 힘을 다해 나를 이끌고 밀어붙였다. 아이 때문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결코 아이에게 이 감정을 대물림해서는 안된다는 그 결심하에 난 목숨을 걸었다. 하혈을 할 만큼 참고 견뎠다. 그 감정을 삼키며 아이를 양육했다. 나의 몸을 희생양 삼아 아이를 지켰다. 그녀가 내뿜은 독기는 내 몸속에 그대로 머물도록 했다. 한 발짝도 내 몸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최선을 다했다. 결코 아이에게 뻗쳐 나가서는 안되었다. 그러니, 내 삶은 항상 지옥이었고 어떻게 아이를 키웠는지도 모르겠지만, 현재 아이는 정말 안전하다. 이 정도면 선방했다. 이게 엄마니까. 이게 아이를 지키는 일이니까. 난 받지 못했지만, 아이에게는 주고 싶었다. 엄마라는 존재를...
하지만, 귀국하고 나서부터 그녀의 언행, 사고, 행동, 새치혀는 다시 아이에게까지 뻗쳐가고 있었다. 그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먼저였고,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지 않는 우리 가족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뭐든 자기가 원하고, 자기가 생각한 방향으로 흘러가야지만 적성이 풀리는 여자였다. 그녀는 아주 기가 센 여자였다. 도대체 부처님을 믿는다는데, 내가 공부한 부처님과 그녀가 믿고 있는 부처님이 다른 분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항상 한다.
가정교육을 잘못시켰다부터 예의가 없다, 친밀감이 없다는 등등의 악담을 고작 11살 아이한테 퍼부었다. 10년 동안 내 몸을, 내 영혼을 받쳐 양육한 아이에게 내뱉는 그녀의 악담은 10년 동안 그토록 살고자 노력한 내 영혼을 고스란히 단숨에 짓밟았다. 그녀는 나에게 한 것과 똑같이, 남동생 자녀들과 비교를 하고, 나와 우리 가족을 무시했다. 어찌 보면 현 나의 배우자도 희생자다. 그녀는 자기처럼 자식은 때리며 키워야 한다며 나에게 강요했다. (난 그녀의 분풀이로 그녀가 짜증 나고, 화날 때마다 회초리로 개 맞듯이 맞고 자랐다.) 그녀는 나와 남동생을 무지 자랑스러워했다. 난 완벽했으니까... 그녀의 인생을 대신 살아줬으니까.
그녀의 모습과, 말에 구토가 나왔다. 분노가 쳐 올라와 숨이 가빠졌다. 마치 공황장애처럼 앞이 흐릿해졌다.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녀를 부숴버리고 싶다는 악에 받친 나의 감정과 에너지는 분출하지 못해, 오히려 나를 삼켜 버렸고,
난 PTSD 특징 중 '정서적 재경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10년 만에 다시... 하....
어쩌면, 내가 가족과 연을 끊을 때 이런 참을 수 없는 그녀의 언행들이 트리거가 되어 한층 더 강단 있게 끊었는 지도 모르겠다.
내가 죽어야 이 싸움이, 이 고통이, 이 괴로움이 끝이 날 것 같았다. 내가 죽어 없어져야 하는데, 내 자식은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 삶에 미련도, 죽음도 더 이상 두렵지가 않았다. 나의 인생은 그녀가 쥐락펴락했고, 나의 감정은 그녀의 감정에 좌지우지되어 내가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죽음' 뿐이었다.
그녀와 함께 노후를 보내는 자체가 공포였다. 그녀 돈에 노예가 되어 족쇄가 채워질까 두려웠다. 한국 와서 다시 일을 하고 싶어 이리저리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이었다. 그녀가 던진 말, '그냥 엄마 아빠 노후나 책임지고, 놀러 다니고 편하게 살지 뭐 하러 돈도 안 되는 아르바이트 하러 다니냐고.' 순간 또 다시 앞이 하얘졌다. 난 매번 그녀 앞에서, 그녀의 이런 말을 들으면 머릿속이 뿌옇게 된다. 수치심, 소외감, 혼란, 분노, 서글픔, 우울감이 나를 덮친다. 외치고 싶었다. 이제 그만 나 좀 내버려 두라고.... 그런데 그녀가 마치 나의 외침이라도 들었다는 듯이 말을 툭 던졌다.
'내가 죽고 나면 그때나 너 자유롭게 살아'라고..
아... 부모가 맞나? 엄마가 맞나?
하..
이른 아침이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오는 차 안에서 어느 순간 난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나 스스로도 울고 있는지 알지 못한순간, 찰나였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울고 있었다. 날씨는 왜 이리 화창한지... 참으려 하지도 않았고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고아가 되었다는 생각에 난 행복했다. 나의 이름을 호적에서 파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음이 이완되고 있었다. 아주 서서히. 이젠 안전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난 10년 동안 내 병을 치유해야 한다는 강박에 내 마음이 어디가 고장 났는지, 어디가 아픈지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었음을 인정했다. 눈물이 더 홍수처럼 흘러나왔다. 괜찮아지기 위해 멈추지 않았고, 나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생각과 아이만 생각했다.
학대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히려 학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심리학 분석 자격증을 취득하고, 아동 미술 심리 치료사를 공부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인지하기 시작했고, 내가 자란 가정환경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이 불쌍해 보였다. 난 다시 나를 외면했다. 그들을 이해하고 품으려 했다. 아니 품었다. 또다시 나를 죽였다. 이런 증상은 PTSD증상을 겪는 희생자들한테서 흔히 볼 수 있는 증상이다. 오랫동안 학습된 나의 희생이 발동되었고 또다시 난 그녀를 놓지 못했다. 너무 무섭고 두려워서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래된 공포가 만들어낸 그림자였다. 다시 그녀를 이해하고 그녀의 조건 없는 사랑을 구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단 한 번도, 나를 진심으로 안아준 적이 없었다.
아프고 학대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게 나라는 사실을 현실을 받아 들여야 비로소 그때부터 치료가 시작된다.
이 사실을 날씨가 화창한 어느 날,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오는 어느 날,
그들과 연을 끊고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선물처럼 찾아왔다.
다시 깨어났고, 깨쳤다.
눈물은 그냥 흐른 게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마주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마지막 자각이었다.
이제는 안다. 위로는 밖에서 오는 게 아니라, 내가 나에게 허락해야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을. 자신을 치유할 책임은 자기 자신에게 있고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힘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나의 상처를 내 손으로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는 큰 해방감을 알게 되었다.
난 자유를 맛보았다.
해방감!
나처럼 힘든 당신, 당신 잘못 아닙니다. 불효 아닙니다. 인지하고 자각하세요. 모든 가정이, 모든 가족이 평범하지 않아요. 사회에서 강요하는 틀속에서 벗어 나 보세요. 좀 더 빨리 내가 처한 상황을 인정하게 되면 치유의 시간도 그만큼 빨라집니다.
by 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