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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로움 속에서 나를 껴안는 연습

죄책감 대신 진실을 품기로 했다

by Choi

몇 살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꽤 어린 나이였다. 그 말을 듣고 어린 나의 가슴은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내 마음 안에 성이 무너졌다. 고요한 울림만 남아 그 빈 곳이 웅웅 울렸다.


" 너 낳고 엄마는 사람 취급도 못 받았다~ 아나?. 딸을 낳았다고 얼마나 죄인 취급을 하는지. 울지도 못하고 아프단 말도 못 했어. 미역국도 못 얻어먹었다. 딸이라서 니 이름도 순자, 인자, 금자 뭐 그런 거로 하라더라. 허이구 ~그래서 니 낳고 엄마가 얼마나 서러웠는지 몰라. 그러니 엄마한테 잘해라"


마음의 고통은 없었다. 그런데도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 조용히 굳어가고 있었다. 커면서 종종 자주 몇 번 더 들었다. 난 태어남과 동시에 죄인이었을까..


그런 나를 입히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사랑 줬으니, 나도 항상 무언가를 해줘야만 하는 그런 관계가 어릴 때부터 시작되었다. 사랑인 줄 알았던 그 관계는 알고 보니 정교하게 짜인 틀 안이었다. 나는 언제나 맞춰야 하는 쪽이었다. 철저히 계산된 관계. 자식을 키우는 목적도 노후를 위한 장기 보험이라 했다. 그래서 아들옆 며느리 보단 딸이 만만하고 편해서 좋다 했다. 난 아들 하나밖에 없어서 큰일이라며 걱정했다.


난 그들의 말이 혼란스러웠다.

나에게 내 노후는 누군가의 어깨 위가 아니라 내 두 발로 조용히 걸어가고 싶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존재로 태어났고, 그 상태로 그들 곁에 더 머물렀다간 정말로 사라질 것만 같았다. 죽음은 막연한 상상이 아니라, 조금씩 구체적인 선택지처럼 다가왔다. 하루가 갈수록 그 생각 속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고, 어느 순간, 나는 자주 내 손목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붉은색이 거기서 흐르는 상상을 할 때면 이상하게 짜릿한 감정이 스쳤다. 아주 깊은 피로와 무력감 속에서, 자해를 상상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삶에는 목적도, 희망도 없었다. 그건, 내 영혼과 인생을 송두리째 그들에게 받쳐야 끝나는 인생이었다. 나는 점점 침잠했고,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문득, ‘이대로는 정말 큰일 나겠다’는 위기감이 들기 시작했다.


감정이 부풀어 오르다 못해 마음 어딘가 금이 갔다. 그 틈 사이로 어둡고 무서운 상상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내가 얼마나 멀리 와 있었는지, 얼마나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는지를. 감히 어떤 자식이 부모가 잘못되기를 바랄까... 이젠 나의 죽음이 아닌 그들의 마지막을 매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나였고 나의 모습이었다. 받아들여야 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가 제정신인지 스스에게 물어보기를 반복했다. 한데, 난 제정신이었다. 잔인한 괴물이 삼킨 내가 보였다.


정말 죽을 것 같아서,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다. 모든 걸 놓아버리고, 버릴 수 있는 건 다 내버린 채, 겨우 망가진 몸 하나 건져 나왔다. 나락으로 떨어진 정신과 영혼은 한동안 방향을 잃고 허공을 떠돌았다. 때로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만은 나를 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아이 같은 마음도 들었다. 맹목적이고 존재만으로도 사랑스럽다는 그런 하찮은 사랑을 갈망하고 갈구했다.


아직도 사랑이 남아 있었는지, 아니면 마지막 기대마저 무너지는 게 두려웠던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건, 그때의 나는 너무 비참했고, 너무 무너져 있어서 입을 열 힘조차 없었다.


외로웠다. 너무 외롭고, 너무 추웠다. 고아가 된 것 같아 홀가분했다는 생각은 순간의 감정이기도 했고, 자주 올라오는 후련함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감정 뒤에서 나는 사실 아주 많이 몸서리칠 만큼 춥고 추웠다.


그 모든 것이 정말 내 탓이었을까. 어릴 적부터 나는 문제가 아주 많은 아이였다. 항상 겁에 질려있었고, 자주 울었고, 쉽게 놀랐다. 밤에 혼자 화장실도 못 가고, 어른들 말과 친구들 말에 자주 위축되었다. 그런 나를 보고, 그녀는 내가 너무 예민하고 유난스럽다고 말했다. 따뜻하게 안아주는 말과 위로의 말을 단 한 번만이라도 들어보았다면 이토록 아프진 않았을 텐데... 항상 돌아오는 말은 비난과 비판 비교였다. 초등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일기장을 읽고 오히려 나를 불러 위로해 주었다. 그 순간의 느낌과 감정은 아직도 내 몸속에 신경에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 엄마가 아니라 선생님이라 그 위로는 따뜻했지만 참 많이 아팠다. 그날 참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되었다. 그 모든 증상은, 나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처한 환경이었다는 걸. 어린아이는 공기 속에 있는 긴장을 제일 먼저 알아챈다. 나는 다만 그 집안에서 가장 먼저 망가질 수밖에 없던 사람이었을 뿐이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엄마의 불안, 아빠의 분노, 그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전쟁 같은 침묵과 폭발 사이에서 그들이 내뿜는 모든 에너지를 다 흡수했을 뿐이다.


그저 ‘딸’이라는 이유로. ‘여자애니까 더 참아야지’라는 말로. 나는 사랑을 얻기 위해, 존재 자체를 숨기고 감정을 조용히 죽였다. 그렇게 나는, 사랑받기 위해 나를 버리는 법을 너무 일찍 배웠다.


트라우마는 단순히 기억이 아니다. 그건 몸에 남아 있는 방식이다. 나는 지금도 특정한 말투나 얼굴 표정 앞에서 숨이 막히고,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나의 신경계는 그 시절의 공포 속에 아직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게 트라우마다. 내가 예민한 게 아니다. 그게 ‘정상 반응’이다. 비정상적인 환경에 놓였던 아이의, 아주 자연스러운 생존 반응.


이제는 의심해야 한다. 왜 늘 내가 문제라고 느꼈는지, 왜 죄책감을 먼저 배우고, 감정을 표현하는 게 이기적인 일처럼 여겨졌는지. 나는 이제 그 모든 생각에 의문을 던진다. 그리고 알아간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었고, 내가 나를 잘못 해석해 온 시간들이었다는 걸.


삶은 여전히 조용히 흔들리지만, 이제 나는 중심을 찾기 시작했다. 이 글을 쓰는 건, 누군가를 탓하기 위함이 아니다. 나의 감정에 처음으로 자리를 내주기 위한 일이다. 이제는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말도 아니고, 복수하겠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나는 살아야겠다.
내 감정으로. 내 이름으로. 내 뜻으로.

그리고
문제는, 나에게 있지 않았다는 걸 말하고 싶다.


또 시간이 지나다 보면, 더 이상 할 말도, 듣고 싶은 말도 없다는 것을..

그냥 그렇다는 것을..

어느 순간 나를 찾기 위한 경계선, 거리두기, 단절 이 딴 것을 부모가 허락해 주기를 바라는 때도 있었다. 그들이 나를 이해해 주고 나의 결정을 받아들여 주기를 바랐던 때도 있었다. 한데 이건 내가 원하는 환상일 뿐이라는 사실은 시간이 흐를수록 잘 알게 된다.


그러니, 당신도 당신 삶을 지킬 수 있는 경계선을 꼭 만들기를..


부디.. 나처럼 되기 전에...

.

.

.


아참, 그래도 한때는 법륜스님 말씀대로 '이 만큼 키워준 것만이라도 감사하다'라는 생각으로 몇천 배까지 해보았지만 진심으로 기도한 나의 영혼은 오히려 나를 갉아먹었고 더 피패하게 만들었다. 그것도 정신적으로 어느 정도 건강할 때나, 그만큼 수용할 만큼 단단한 마음의 그릇이 될 때나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by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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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거북이를 좋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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