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이유로 버티기
무엇부터, 어디서부터 이 글을 시작해야 할까. 그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사건과 사고, 고요한 날과 요동치는 감정의 시간들. 그 모든 것을 하나하나 나열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 나는 그냥,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을 의식의 흐름대로 흘려보내고 싶다.
참 오랜만이야, 브런치.
가끔 의문이 들었다. 브런치 편집자는 어떻게 나의 글을 읽고 나를 ‘라이프 크리에이터’로 선정했을까?
내 글 속에서 정말 ‘나’를 본 걸까? 사실 나는 어떤 특정한 주제를 정해 전략적으로 글을 쓴 적이 없다. 그저, 중년의 한 여자가 일상과 감정을 풀어내듯 써 내려간 글들. 그러던 어느 날, 내 이름 앞에 ‘라이프 크리에이터’라는 타이틀이 달려 있었다. 처음엔 기분이 꽤 좋았다. 뭔가 인정받은 듯한 감정.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정말… 내가? 라이프 크리에이터?” 최근 병원을 다니며 상담을 받는 과정에서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그 속에서,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놀라운 진실과 마주했다.
나는 생각보다 훨씬 호기심이 많고, 추진력이 강하고, 깊이 사고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엄마라는 존재에게 눌려 살며 한 번도 ‘주체적으로’ 살아본 적 없었다는 것.
그런 내가 지금, 다시 살아보려 한다.
다시 일어서고 싶고,
다시 사랑받고 싶고,
다시 나 자신이 되고 싶다.
이제야 ‘나’라는 생명이
숨을 쉬기 시작한 것 같다
직원식당에서 홀로 밥을 먹다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정말 고개를 푹 숙이고 웃었다. 정말,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하하하' 하고 소리 내 웃어버렸다. 고개를 푹 숙였지만,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남들이 볼까 부끄러워 식판 위에 놓인 두부와 김치, 그리고 빨갛게 빛나는 깍두기 두 개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뻣뻣한 작업 조끼, 낡은 장갑, 그리고 낯선 공간. 그 모든 것들이 우스워 보이고도 슬펐고, 한편으로는 나 자신이 웃기기도 해서, 그렇게 실실 웃기도 하고 소리 내 웃기도 하면서 점심을 마쳤다. 웃음이 멈춘 뒤에는 허무가 밀려왔고, 식사를 마치자마자 여성 휴게실로 올라가 대자로 누웠다. 다리를 벽에 올리고, 아무 생각 없이 천장을 바라보다가 56분이 될 때까지 그렇게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혼자만의 휴식을 취했다.
아참 직원식당? 취직했냐고요? 네. 하하하하하 웃지 못할 일이다. 알바 공고가 올라왔다. 아이는 고등학생으로 올라갔다. 지하철, 버스, 택시 타는 법을 알려주었고, 어차피 한글 잘 못해도 영어로 다 되어 있고 집과 학교는 가깝기에 큰 무리가 없을 거란 판단이 섰다.
병원을 다니면서, 선생님이 내 일을 가져 보는 것도 어쩌면 나의 치료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그 말 한마디에'난 바로 실행에 옮겼다. 더 이상 등교, 하교 시간에 메여 50살이 되어 버린 나의 삶을 탓하며 아무것도 제대로 못 해봤다는 자책 대신, 이제라도 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살아 있다는 감각, 인생이라는 이 낱말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숨을 쉬며 살아간다는 게 도대체 어떤 건지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었다. 어쩌면 늦은 각성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마음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 내려놓았다. 그동안 나를 감싸고 있던 번듯한 타이틀들, 그럴듯한 수식어들, 하나하나 다 지웠다. 교육대학원 수석 졸업도, 테솔 대학원 우등 졸업도, 국제학교 교사 경력도, 외국 고등학교와 대학교 졸업도 모두 뺐다. 대신, 단 한 줄. ‘고졸’이라고만 썼다.
사실 예전에는 있는 그대로 다 적었고, 이력서에서 두 번이나 떨어졌다. 그때 깨달았다. 이 사회는 여전히 타이틀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걸. 나는 그런 사람도 아니고, 그런 삶을 원하는 사람도 아니고,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신념으로 살아왔지만, 현실이라는 벽은 나의 철학 따위는 가볍게 무시했다. 학벌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하지만 현재 내가 살고 있고 속해 있는 사회는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난 사회가 정한 규정에 맞추어 해외고등학교 졸업도 아니고 그냥 '고졸' 로만 적었다.
그리고 믿기 어렵겠지만, 그날 이력서를 넣고 하루 만에 연락이 왔다. 그것도 예전에 두 번이나 떨어졌던 바로 그곳에서. 나는 분명 파트타임으로 지원했는데, 막상 시작해 보니 거의 정직원 대우에 가까운 업무를 맡았다. 출퇴근 시간도, 업무 강도도 정직원과 다르지 않았다. 나이 오십에 맞이한 출근이라는 낯선 경험이, 때로는 씁쓸하게, 때로는 대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일은 생각보다 훨씬 고됐다. 벌써 링거를 한 병 맞았고, 허리는 아파서 물리치료를 다니고 있다. 15년 가까이 집안일만 하다, 바깥에서 생전 처음 일하는 나에게 이 일상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하루하루 몸이 말해주는 피로가 쌓여가고 있지만, 그래도 지금은 버티고 있다. 계약은 6개월. 잘하면 1년 연장도 가능하다고 들었지만, 사실 나는 그 6개월을 채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무너질까 봐, 매일같이 조용히 나 자신을 들여다본다.
무슨 일을 하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대형마트 캐셔. 카드 단말기 앞에 서서 수없이 반복되는 바코드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보낸다. 손목이 아프고, 허리가 뻐근하고, 웃는 얼굴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지금 나는 세상과 다시 연결되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실과, 내가 놓아버렸던 나 자신과, 아주 작지만 진짜로 이어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 그리고 이 일이 단순한 ‘일’이 아니라, 나를 살리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어가고 있다는 걸, 오늘따라 조금은 선명하게 알 것 같다.
현재 내가 있는 곳은 학교도, 학원도 아니다. 지금 난 대형 마트에 소속되어 있다. 유통업체이고, 캐셔로 일하고 있다. 계열사 마트나 스타벅스는 직원 할인도 되고, 복지도 잘 되어 있는 편이다. 하지만 나에게 그런 조건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지금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단 하나, 내가 이곳에서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뿐이다.
헌데,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내가 있는 이 공간은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든다. 학교나 학원에서의 삶과 참 많이 닮아 있다. 여자 직원들이 대부분이고, 마치 교무실처럼 꾸며진 캐셔 사무실에서는 여러 개의 사물함과 일정표가 빽빽하게 붙어 있고, 누가 오늘 몇 시까지 근무인지, 누가 휴일을 받았는지가 일정표 하나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업무는 시간표대로 돌아가고, 마치 선생님들이 시간표 눈치 보며 동료 교사와의 사이를 조율하듯, 학원 강사들이 좋은 시간대를 받기 위해 교수부장과 협상을 벌이듯, 이곳에서도 캐셔들은 SV(Super Visor)와 친분을 쌓고, 자신에게 유리한 스케줄을 얻기 위해 보이지 않는 전략들을 펼친다. 내가 보기엔 그 모든 장면이 하나같이 익숙했고, 또 한편으로는 참 불편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그 분위기 안에서 불편하고, 날 선 감정을 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들의 인생은 그들의 것이고, 나는 그 안에서 조용히 나의 삶에만 집중하면 되니까. 내가 살아야 하고, 내가 무너지지 않아야 하니까.
나는 이제 그 어떤 관계에도, 그 어떤 눈치에도, 그 어떤 정치에도 관심이 없다. 단지, 이 공간 안에서 내가 얼마나 오래, 얼마나 단단하게 버틸 수 있느냐, 그게 나의 유일한 관심사다. 사실, 이곳은 내가 16년 만에 집을 탈출해 도전한 첫 사회생활이다. 업무 강도는 높지만, 다행히 일 자체는 복잡하거나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다만 반복이다. 끊임없는 반복. 하루에 수백 번씩 "고객님, 234,440원입니다", "포인트 적립 도와드릴까요?", "일시불이신가요?", "상품권 결제이신가요?", "쿠폰 사용 가능하십니다", "삼성카드로 결제하셔야 만 원 할인됩니다" 같은 멘트를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그 결과, 나는 다시 후두염에 걸렸다. 예전엔 강의를 하며 만성 후두염을 달고 살았는데, 이곳도 다르지 않았다. 말의 노동, 언어의 반복은 육체보다 더 피로하게 목을 조여 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일을 통해 분명히 하나를 얻었다.
그것은 바로 '용기'였다.
말로만 아는 용기가 아니라, 정말 '용기'가 뭔지 알게 된 순간이었다. 잊을 수 없는 생생항 마음의 용기...용기라는 작은 숨소리를 듣고 느꼈다.. 이거구나.. 용기란것이…
체력이 따라주지 않고, 아이의 학교 행사나 집안일로 인해 스케줄 조정이 어려워져서 아이에게 큰 피해가 간다면, 나는 이 일을 과감히 그만둘 생각이다. 내 인생이 피폐해지는 순간이 온다면, 주저 없이 멈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분명히 너무 큰 용기를 얻었다. 예전에는 ‘교사’, ‘강사’, ‘대학원생’, ‘연구원’, ‘통역사’ 같은 말들로 나를 설명했다면, 이제 나는 그것들을 내려놓을 용기가 생겼다. 더 이상 그런 타이틀로 나를 붙잡아둘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언젠가, 이 일을 멈추고 또 다른 일을 시작하게 된다면, 나는 이제 어떤 일이든, 어떤 타이틀이든 두렵지 않다. 나이 오십, 다시 시작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을 나 자신이 생긴 것이다.
어느 날 그녀가 말했다. 병원 선생님, 나의 마음을 오래 지켜봐 주던 그 사람이.
"나이가 오십이라서, 당신을 받아줄 곳을 찾는 게 아니에요. 오십이라도,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하고 싶은 일을 찾고, 당신이 스스로 일을 찾아가는 거예요."
그 말이 내 가슴에, 내 머릿속에, 통으로 박혔다. 마치 무언가가 머리를 망치로 내리친 것처럼 명료하게, 동시에 따뜻하게. 나는 그날, 많이 울었다.
혼자서, 오래도록, 소리 없이.
나는 심리학 책을 수십 권 읽고, 공부를 하고, 자격증까지 땄다. 하지만 그녀, 단 한 사람의 전문가가 건넨 그 짧은 문장은 내가 그동안 쌓아 올린 모든 이론보다 더 깊이, 더 정확히, 나를 꿰뚫고 있었다.
그녀는 또 말했다.
"당신은 지금, 연민을 느끼는 시점에 온 것 같아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나의 사고가 달라지고 있었으니까.
엄마를 바라보는 시선이, 엄마와의 관계를 받아들이는 나의 방식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엄마는 여전히 당신을 이해할 수 없지만, 이제 당신은 어쩌면 엄마를 조금은 이해할 가능성이 생긴 것 같아요."
그 말이 이상하게 아팠다.
가슴이, 너무 시렸다.
나는 어쩌면, 엄마가 부처님께 참회하기 전에 나에게 참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 욕망이 나를 얼마나 집요하게 괴롭혔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마귀가 쉬었다’는 말, ‘귀신 들렸다’는 말, 그 말들을 마치 굿판처럼 아무렇지 않게 내게 내뱉던 엄마에게 나는 한 번쯤 정면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건 아니라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당신이 나를 아프게 했다고... 하지만, 난 차마 내뱉지 못했다. 그녀에게 상처를 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 마음은 아프다.
아프고 쓰리고, 그래서 눈물이 흐른다.
나는 여전히, 엄마가 나를 이해해 주길 바란다.
그런데 이제는 안다.
그녀는 너무 늙었다.
그녀는 이미 부처님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 있고, 그곳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현실이 내 눈앞에 선명하게 놓일 때,
나는 참 많이 외롭고 서글퍼진다.
그게 가족이라는 이름의 그림자이기도 하고, 나라는 인간이 짊어진 삶의 한 문장이라는 걸.
‘용기’라는 단어는 예전에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 ‘용기’가 뭔지 알게 된 건, 어느 날 아주 평범한 하루 속에서였다.
흘러가는 세월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게 되고,
‘이게 인생이구나’라는 말을 어느새 담담하게 내뱉을 수 있게 되고,
지금 이 순간, 내가 만들어가고 있는 삶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을 수 있게 된 그때.
그게 용기였다.
나는 바란다.
누군가도 이 ‘용기’를 느껴보기를.
너무 힘들면, 저를 보세요.
넘어졌을 때, 일어나기 힘들다면 저처럼 병원의 도움을 받아도 괜찮아요.
그건 절대 약한 게 아니고, 오히려 그 자체로 강한 선택이에요.
함께, 일어나요.
전 아직,
두 무릎을 꿇은 채 반도 제대로 못 일어났지만,
내일은 ‘6km를 달리자’는 목표를 스스로에게 건네어보려 해요.
그리고, 언젠가 완전히 일어나는 그날까지,
달리고,
쓰려합니다.
by 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