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바쁨을 그만두어 본다
'재택근무', '집콕' 등의 키워드가 화두에 오르기 이전에도 나는 실내 지향적인 사람이었다. 집 밖 반경 500미터 터를 벗어나면 급격하게 체력이 떨어지고 성격이 나빠지는 반면, 내 집 내 소파에 드러누워 있으면 세상 너그럽고 관대한 사람이 되었다. 가장 싫어하는 세 가지가 신체활동, 단체활동, 야외활동이기까지 하니 자가격리에 최적화된 성격이나 마찬가지여서, 대집콕시대를 맞이한다고 한들 평소와 생활이 별반 달라질 것도 없었다.
이런 사람의 취미생활이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로 드라마틱하게 달라질 일도 없을 듯했다. 그러나 전 국민의 생활 패턴의 변화는 나처럼 내향적인 사람에게도 영향이 있었다. 그나마도 얼마 없던 약속 횟수가 2019년 연말부터 조금씩 줄어들었고, 재택근무가 시작되고 나서는 통근시간이 사라졌다. 퇴근시간이 더 이상 불규칙하지 않으니 매일 저녁 일정한 수준의 여분 시간이 생겨났다. 남는 시간이 생기자 가만히 있느니 뭐라도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데자뷰가 느껴졌다. 10대 시절 주말에 늘어져 있으면 엄마가 와서 그렇게 드러누워있지만 말고 뭐라도 좀 하라며 옆구리를 쿡쿡 걷어찬 경험은 모두들 해 봤을 거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새로 생긴 여가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하는 게 좋을까?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여 이전보다 많은 시간을 집에서 보내고, 그러면서 다양한 취미 활동을 찾아 헤맸던 듯하다. 게임기의 수요가 늘어 어떤 모델은 아직도 품귀 현상을 겪고 있고, 집으로 배송해 주는 '취미 키트', 온라인 강의 수강 등에도 사람들이 이전보다 다수 몰렸다고 한다.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혼자 즐길 수 있는 취미를 집대성해놓은 온라인 강의 전용 플랫폼에는 미술, 사진, 동영상, 홈 트레이닝, 요리 등의 강좌가 넘쳐난다.
나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 이전에도 온라인 취미 강의 플랫폼을 종종 이용하곤 했다. 그래서 자연스레 온라인 강의 플랫폼에서 적절해 보이는 취미 활동을 검색하기 시작했는데, 강좌 제목과 커리큘럼을 살펴보다 보니 신식 취미활동들이 대체로 두 가지 키워드로 나뉜다는 점을 발견했다. 첫째는 평범한 일상을 바꾸어 준다거나, 몰랐던 자신의 능력을 발견한다는 등의 '자기 개발' 키워드이다. 수공예나 미술 강좌 등이 여기에 해당하며, 최근 들어서는 그림 그리는 방법이나 펜글씨 예쁘게 쓰는 법을 넘어서서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작품을 어떻게 상품을 제작하고 판매할 수 있는지까지를 설명하는 트렌드가 눈에 띈다. 둘째는 취미로 직장을 다니는 것만큼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거나, 평범한 사람이 돈을 만든다거나, 노트북 한 대로 월 n백만원의 수익을 올린다는 등의 '부업/재테크' 키워드이다. SNS를 활용한 무자본 창업, 요즘 핫한 유튜브, 해외구매대행이나 주식 관련 강좌를 주로 볼 수 있다.
나는 여기서 검색을 멈추고 고민에 빠졌다.
언제부터 여가가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시간이었을까?
네이버에서 '여가'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여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해 준다.
휴식을 겸한 다양한 취미활동이 포함되는 경제 활동 이외의 시간으로 개인이 처분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 자유시간·레저
여가는 직장 업무에서 벗어나 개인이 자유롭게 자신이 재미와 흥미를 느끼는 일에 몰입할 수 있는 활동으로,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균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활동이다. 경제발전과 더불어 생활의 여유가 증가하게 되면, 여가 역시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산업사회는 직장과 가정을 분리하였을 뿐 아니라, 여가 역시 분리하였다. 일과 여가의 분리가 그것이다. 주말과 휴가, 근무 이후의 시간 등을 이용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그 일을 즐기는 과정에서 각종 스트레스를 해소하며 재충전의 기회를 갖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여가 [Free time, 餘暇]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즉 여가란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시간으로, 개인이 원하는 일에 자유롭게 몰입하면 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스크롤을 좀더 내려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여가 활동의 불건전한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한국의 여가 시간을 가장 많이 잠식하고 있는 것은 단연 TV이고 음주이다. 하루 평균 3시간이 넘게 TV를 시청하고 있고, 음주 횟수가 일주일에 평균 2회 정도이다. 집에서 가장 많이 하는 것은 TV 시청이고, 사람을 만나서 가장 많이 하는 활동이 주로 음주이다.
(중략)
가족이나 많은 사람과 함께 자기 개발과 휴식을 동시에 취할 수 있는 여가 문화가 잘 발달되어 있지 못한 편이다. 가족들이 모여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건전한 오락, 자기 개발을 위한 여가 활용 방법, 봉사와 정치참여 등 사회참여 방법 등이 개발되고 발전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여가 [Free time, 餘暇]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재미있게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TV시청 및 음주를 한국인의 여가 시간을 '잠식'하고 있는 '불건전한' 활동으로 취급하고 있는 듯하다. (논란의 여지야 있을지언정 TV시청과 음주가 그 자체로 불건전하다는 누명에 대해서는 글 한 꼭지를 통째로 할애해서 변호하고 싶으나 일단 참자.) 또한 자기 개발을 위한 여가를 권장하고 있으며, 여가 시간을 봉사 혹은 정치 참여 (아무래도 너무 거창한 것 같지만 이것도 일단 넘어가자) 에 활용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간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가가 개인이 원하는 일에 자유롭게 몰입해도 되는 시간이라면 우리는 어째서 여가를 통해서까지 자기 개발, 다시 말해 '생산성'을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
산업혁명 이전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본다. 인류에게 빈부격차가 생긴 이래로 하층계급은 끊임없이 노동을 해야 했고, 주로 귀족에 해당하는 상류층은 자신이 금수저임을 자랑하기 위해서라도 게으른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노동은 '천한 것'들이나 하는 것이니까! 소설 <카밀라>에서는, 흡혈귀라서 햇빛을 피해야 하다보니 그랬던 것이지만, 미모의 뱀파이어 소녀 카밀라는 정오가 넘어서야 겨우 기어나오듯 일어나서 핫 초콜릿 한 잔 마시는 둥 마는 둥 하고 도로 침대로 기어들어가 낮잠을 자는 (몹시도 부러운), 2020년대였다면 등짝을 맞았을 만한 생활 패턴을 보인다. 어지간히도 게으른 사람 취급을 받거나 정말로 흡혈귀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 만도 한데, 주변 사람들은 그냥 병약한 여자애라 그렇지, 하는 정도로 넘어가고 만다.
게으름이 부의 상징이며 빈둥거림이 여가의 핵심이던 아름다운 시대는 언제쯤 끝났을까? 미국의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이자 워킹맘인 브리짓 슐트는 산업혁명 시기, 시간이 더 이상 연속체가 아니라 분할 및 측정이 가능해지고 그로 인해 '자원'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시점을 분기점으로 꼽는다. 그녀는 바쁘다는 말의 정체를 파헤치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학자, 정치인, 기업인을 만났고 <타임 푸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의 도입부에서 슐트는 50년 이상 시간이라는 주제를 연구한 사회학자 존 로빈슨을 만나 시간일지를 작성하는 연습을 하는데, 여기에서 눈이 번쩍 뜨이는 대목이 하나 나온다.
로빈슨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노동시간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p27, <타임 푸어>, 브리짓 슐트 지음, 더 퀘스트 출판사
이 문장을 읽자마자 머릿속에서 번개가 치는 듯하더니 몇 해 전, 이직하기 전에 직장 동료와 나누었던 대화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 날 밤 동호회 행사 준비 때문에 동호회원들이 전부 다 모일 예정이었다. 소집 시간이 공식 퇴근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이후라서, 여유가 되는 멤버끼리는 저녁식사를 하자고 해 놓고 정작 다들 일이 바쁘다며 나오지 않아 단 둘이서 비싼 밥을 먹으러 간 참이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일은 어떠냐는 질문에 요즘은 그다지 일이 많지 않아 바쁘지 않다고 대답했더니 그 분이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야옹님, 여기서는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에요.
바쁘지 않다고 말하면 안 된다는 의미였다. 바쁘지 않다는 말에 어떠한 결격 사유라도 있는 걸까? 그런데 그보다 더 과거의 일을 돌이켜보자면, 나는 어느 친척 어른이 무심코 '네가 회사 일이 바쁘면 얼마나 바쁘다고'라는 말에 발끈했던 적이 있는데 그 말을 '너는 별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도 아니잖니'라고 해석해서 그랬던 것 같다. 바쁘지 않은 인간은 곧 무능한 인간이고 어딘가 모자라며, 바쁜 사람은 유능하기 때문에 바쁘다는 인식이 보편화되어 있다. 슐트가 만난 바쁨 연구자 앤 버넷은 언어가 현실에 미치는 영향 연구의 일환으로 미국인들이 지난 수십 년간 주고 받은 크리스마스 카드 수천 장을 분석했다. 그리고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쓰고 있는 게 크리스마스 카드라는 사실을 마치 망각하기라도 한 것처럼 메리 크리스마스 한 마디 적어놓고서는 자기가 한 해 내내 얼마나 바빴는지를 열심히 적어내렸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버넷은 사람들이 사실은 바쁨을 하소연하는 게 아니라 바쁨을 자랑한다고 지적했다.
"사람들은 누가 더 바쁜지 경쟁하고 있어요.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는 거죠. 바쁜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고, 바쁜 삶이 충실하고 가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들 '당신보다 내가 더 바쁘다'고 자랑해요. 자신이 이웃들만큼 바쁘지 않으면 더 분발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중략)
20세기 말, 버넷과 같은 학자들은 바쁨이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고 주장했다. 이제 바쁨은 사회적 지위가 높다는 징표다.
p73, <타임 푸어>, 브리짓 슐트 지음, 더 퀘스트 출판사
책을 읽어나가면 읽어나갈수록 흥미로운 대목이 점점 더 많아지고 내 책도 그에 따라 연필로 줄치고 메모한 자국이 늘어난다. "영국인 10명 중 4명이 디저트가 섹스보다 좋다고 생각하는데도 10명 중 8명은 너무 바빠서 그 좋아하는 디저트도 먹지 못한다 (p77)." 이런 세상에! 분명 20세기 초 석학들은 미래에 인류가 너무 한가해져서 탈일 거라고 예측했는데 말이다.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스는 2030년이 되면 사람들이 1주일에 15시간밖에 일하지 않을 거라고 예측했다. 그렇다. 어디 듣보잡 자칭 경제 전문가가 아니라 현대 거시경제학의 아버지이자 경제학과에서 아직도 열심히 그의 이론을 배우는 그 케인스가 한 예측이다. 2030년까지 이제 딱 10년 남았는데, 일주일에 15시간은커녕 52시간을 가지고도 이렇게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면 케인스가 기존 모델을 어떻게 수정할지 매우 궁금해지는 지점이다.
내가 품은 질문은 브리짓 슐트가 <타임 푸어>를 통해 던진 질문과는 약간 성격이 다르지만 근본적인 지점에서는 맞닿아 있다. 슐트는 <타임 푸어>를 쓰면서 현대인은 어째서 일에만 매진하고 여가를 누리지 못해 늘 바쁜 삶을 살아가는지를 파고들었다. 내가 궁금한 것은 왜 판데믹의 출현으로 인해 강제로 여가시간이 생기는 순간조차도 현대인은 그 시간에마저 생산적인 행동을 하려고 애쓰는지이다. 비생산적인 여가 활동을 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생산성 경찰이 집에 들이닥쳐서 날 잡아가지는 않을 테고, 나는 남들보다 무능하다는 감각에 사로잡혀 무기력해질까? 정신건강이 나빠질까? 자기존중감에 상처를 입을까? 아니면 의외로 이로운 효과를 누릴까?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를 흰쥐 삼아 비생산적이고 바쁘지 않은 여가를 즐기는 실험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주기적으로 일기를 써서, 나의 심리상태와 정신건강이 한가로이 늘어지는 여가 생활과 어떤 상관관계를 보일지 관찰하기로 했다. 이 실험을 위해 내가 세운 '비생산적이고 무의미한 취미생활'의 규칙은 다음과 같다.
기특한 목표(예: 춤으로 3kg 감량, 늦가을에 고구마 수확)가 없을 것.
본업과 관계가 없으며 본업의 생산성을 어떤 형태로든 향상하지도 침해하지도 않을 것.
뚜렷한 산출물이 없거나, 산출물이 식품(베이킹), 소모품(수세미 뜨기) 혹은 무의미한 잡화(수채화)일 것.
만일 취미/여가 활동을 통해 수익이 발생한다면 반드시 그 이상을 취미/여가 활동에 지출할 것.
재미가 없어지거나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느끼는 순간 그만둘 것.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나는 게임 회사에 재직 중이라서 게임을 하면 2번 규칙에 위배되고 만다. 재미있는 게임을 하면서도 마음 한켠으로 이 부분의 구현은 어떻게 했을지, 로그는 어떤 식으로 남길지, AWS를 사용하고 있는 듯한데 어디에 위치한 걸 이용하고 있을지 (그리고 한 달에 얼마로 계약했을지)를 자꾸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쉬움을 남긴 채 게임을 하는 시간과 여가 시간을 분리하기로 했다. 대체로 내 비생산적인 여가시간의 대부분을 게임이 차지했기 때문에 적당한 아이템을 발굴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하여 게임을 제외한 비생산적 여가의 첫 스타트를 조심스럽게 끊었으니...
바야흐로 코바늘 수세미 뜨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